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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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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가는대로 짙은 아침 안개로 하루가 열린다. 오늘 저거다. 놓여있던 새 캔버스는 치우고 다시 이젤에 얹었다. 지난 여름 어느날 시작했다가 몇 달 째 밀쳐두었던 게 하나 있었다.
버갯속 영감님의 부탁 버갯속 영감님은 뇌졸중으로 꼬빡 삼년째다. 본래 귀가 어두운데다 이젠 말씨까지 어눌해 손짓 발짓에 서로 쳐다보는 표정으로 겨우 소통한다. 전립선 약을 수십 년 드신 끝에 이젠 오줌 누기마저 힘들다. 요즈음 들어 병원 출입이 잦다. 버갯속 영감님은 일력을 가리키며 검지와 중지 손가락 두 개를 ..
저녁 한때 마을 풍경 마을 한가운데 늙은 팽나무 끼고도는 높다란 공터는 동네 사랑 마당이다. 한낮에는 코끝도 보이지않더니 저녁놀 등에 지고서야 슬슬 모여든다. 손에 든 부채는 심심풀이 각다귀 퇴치용이다. 도통 바람기 한점 없다가 해 넘기니 간사지 논두렁 넘어오는 마파람이 살아난다. 수박도 있고 소주도 있고... ..
여름과 가을 사이 가는 여름의 시샘인가 오는 가을의 투정인가. 또 비가 온다네. 마루에서 말리던 고추를 대피 시켰다. 그저께 꼭두새벽에 내린 비가 148미리. 천둥번개에 이런 폭우는 처음 보았다. 내려다 보이는 간사지의 도내수로는 온통 흙탕물이다. 처마 끝 풍경이 억센 마파람에 요동친다. 가을로 가는 길목. 오늘..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햇볕이 따가울수록 그늘 아래서 책 읽는 재미가 있다. 때론 수박 한조각, 해질녁에는 얼음 몇알 넣은 과일주 칵테일도 그런대로 근사하다. 며칠째 손에 잡고있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오늘 다 읽었다. 宋襄之仁 고사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춘추시대 홍수를 사이에 두고 송과 초가 대치했다. 군사..
대추 반가운 소식 하나. 대추 풍년 예감. 대추나무를 버갯속 영감님 댁에서 우리집으로 옮겨심은 지 여섯해 만이다. 다 자란 나무라 장비로 파서 큰 가지는 쳐가며 심었는데 그동안 몸살이 심했다. 대추꽃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지금 한창 연달아 꽃이 피면서 줄줄이 대추가 맺히기 시작한다. 대추가 ..
덥다 삼복이다. 오락가락 장마가 물러나자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렬한다. 동쪽 처마 끝에 비치는 햇살에서 오늘 하루가 짐작된다. 찜통더위다. 인삼포 지나 논길을 따라 걷는다. 아침이슬에 가랑이가 젖어도 새벽 산보는 삽상하다. 아침나절이 바쁘다. 열시까지 댓시간 동안 걷어내고 뽑아내고 정리한다. ..
배롱나무의 어원 서쪽 뜰 끄트머리에 있는 배롱나무가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해마다 이맘 때면 붉은 색을 수놓는다. 이젠 한여름 내내 피고지고 가을 문턱까지 갈게다. 그래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한다. 나는 배롱나무의 어원을 알고싶다. 그런데 어디에도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록이 없다. 왜 배롱인가. 겉과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