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초

(186)
잡초라는 이름표 이름 없는 식물은 없다. 수없이 많은 야생초 풀들. 구태여 명찰을 알려고도 않고 인간이 잘 모르면 잡초라는 이름으로 대충 넘어간다. 소루쟁이, 한삼덩쿨, 쇠비름, 개비름... 우리 밭에서 안면 튼지 오래된 내가 잘 아는 몇 안되는 잡초의 이름표다. 나머지는 도매금으로 그냥 잡초다. 둘러보면 온통 잡초 전성시대. 이제부터 농사는 잡초와 전쟁이다. 잡초에게 이겼다는 농부가 있다면 그건 허풍. 기어이 이기겠다면 허세다.
콩밭 매는 아낙네, 마늘밭 매는 남정네 호미를 아예 걸쳐두고서 다른 밭일을 하다 짬 나는대로 마늘밭 양파밭에 김을 맨다. 허리를 꾸부려 오래 할 수가 없다. 오늘도 새삼 김매기가 힘든 줄을 알겠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콩밭과 마늘밭 어느쪽이 더 힘들까? 콩밭은 뙤약볕 오뉴월이고 마늘밭은 봄볕이다.
농부의 하루 심다 몇톨 남은 씨감자를 마무리로 마저 심었다. 마침 눈에 보이기에 대파밭에 잡초도 잠시 매주었다. 오늘부터 달려들어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검정비닐 멀칭작업이다. 달포 뒤 심을 모종의 작물에 대비해서 밭 이랑을 비닐로 덮어두는 것이다. 사래가 길어 허리를 꾸부렸다 폈다를 반복해야 한다. 비닐 롤을 굴려가며 군데군데 삽으로 두둑 언저리의 흙을 파서 비닐 가장자리를 눌러주고 바람에 펄럭이지 않도록 흙더미를 올려주었다. 오후에 읍내를 다녀오느라 오늘은 한 이랑의 절반으로 끝났다. 비닐 피복작업을 모두 끝내려면 대엿새는 잡아야 할듯. 어쨌거나 부지런한 사람 일하기 딱 좋은 계절.
마늘밭 김매기 짜투리 동밭의 양파밭 마늘밭. 며칠 전 안마을의 옥향할머니가 "저 풀을 어떡할거유?!" 탄식을 하며 지나갔다. 잡초란 어릴 때 뽑아주는 게 상책. 그러나 제때 김매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일 저런일 하다보면 후순위로 밀리기 마련. 짬을 내 오늘 호미를 들었다. 호미 아래선 냉이도 잡초. 수북히 손에 잡히는 어린 냉이가 향긋하다. 함께 묻어오는 흙냄새가 풋풋하다. 마침 저녁밥상에 냉이국이... 저녁 무렵 마실길에 만난 버갯속 할머니가 주신 냉이라나요.
뚱딴지, 돼지감자 촌스런 이름일수록 친근하고 몸에도 좋다. 푸대접을 받는건 주위에 지천으로 많기때문이다. 마른 수숫대를 지난 가을에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정리하다가 돼지감자를 무더기로 캤다. 옥수수밭에서 웬 돼지감자가 뚱딴지같이... 밭갈이 할 때 밭둑 가장자리에서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던 돼지감자 조각이 어쩌다 잘려 들어와 자랐던 게 분명하다. 지난해 내내 귀찮게 굴던 애물단지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새삼 만나니 반갑다. 튼실하고 예쁘다. 흔히들 돼지감자를 '뚱딴지'라 부른다.
봄은 잡초가 먼저 안다 쑥이다. 냉이꽃이 피었다. 양지바른 동밭 언덕바지에. 앞산 솔밭으로 내려가는 소롯길 왼쪽으로 자그만 밭뙤기를 줄여 '동밭'이라 부른다. 동밭에는 마늘, 자주 양파, 당근, 꽃상치들이 자란다. 지난해 늦은 가을에 심은 건데 한겨울을 지냈다. 이제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물이 오른다. 그러나 잡초들이 기승이다. 잡초와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농사는 잡초와 한판 승부.
까마중 그 향기는 또 어땠던가. 가을 들어 한동안 흐드러지게 피었던 축대 틈새의 황국도 시들해졌다. 밭둑 가생이에 여기 저기 기세좋던 개망초 무리도 어느틈에 이젠 갔다. 반짝반짝, 오늘 야콘을 캐다 고랑에 잡초 덤불서 나온 까마중. 그리고 한떨기 까마중 하얀꽃잎. 오랜만일쎄. 이 늦은 가을에.
기선제압? 잡초 동서로 수내수로가 가로지르는 앞뜰은 모내기가 한창이다. 나는 하루종일 제초 작업을 했다. 장독 마당, 윗밭, 아랫밭 계단을 오가며 풀을 깎는 하루였다. 갈수록 기세등등해지는 잡초. 더 이상 기고만장해지기 전에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 더 이상 방치하면 통제불능이다. 좀 더 일찌감치 풀을 깎는다 하면서도 모종 심느라 미뤄왔다. 하루 종일 예취기를 들고서 잡초와 씨름을 했다. 잡초의 저항이 거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