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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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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 쌀 때가 있다 대파, 쪽파도 이사를 해야 한다. 옮겨 심어야 한다. 지난 해 늦가을에 심어 덜 자랐다. 땅심을 밭아 초봄에 부쩍부쩍 자랄 터인데 고생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이사를 서두르게 된 건 밭갈이를 해야 하기 때문. 버갯속 영감님댁 김계장에게 밭갈이를 부탁했는데 언제 트랙터를 몰고 나타날 지 모른다. 사전 예고도 없이 자기들 농사 일정에 따라 들이닥치기 일쑤다. 요즘 며칠 째 아랫 밭과 윗 밭을 돌 계단을 사이에 두고 오르내리고 있다. 일일이 파다가 옮겨 심는 일... 농작물도 이삿짐 쌀 때가 있다.
왜, 뒷걸음치는지 몰랐다 앞뜰 마파람이 하도 거세서 걷기운동 코스로 마을 안길을 택했다. 버갯속 영감님 할머니가 망연자실 하듯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흔의 연세다. 갑자기 일어서 경사진 언덕바지를 거꾸로 기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일하다 벗어 두었던 윗도리다. " 에고, 힘들어! " ... .... 뒷걸음으로 기게 하는 세월이 힘들게 한다.
(歲暮斷想) 도내나루의 어제, 오늘 '복덕방'은 나를 연포, 채석포, 안흥 방면의 관광지대를 먼저 데리고 갔다. 서울서 왔다니까 전원주택지를 찾는 큰손으로 알았던 듯. 몇 군데 물건을 보여주었으나 마뜩치 않았다. 해는 저물고, 돌아오려는 데 올라가는 길도라며 자기집 근처 마지막 한군데를 안내했다. 뒤로 바다가 보이고 앞으로 넓은 뜰이 있는 곳. 안마을로 돌아내려가니 옛 나루터가 있었고, 개펄이 있고, 작으나마 모래톱이 있어 소나무 그늘을 의지해 누군가가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 광경이 내마음에 꽂혔다. 나의 소망은 조그만 귀촌이었다. 그동안 복덕방을 거쳐간 손님들, 아무도 거들떠 보지않았던 곳을 내가 선뜻 매매계약을 결정하자, "땅은 역시 주인 따로 있다" 며 한 건 올린 안도감에 젖은 '복덕방'의 표정과 그 한마디가 지금도 생..
희아리 고추와 노파심 버갯속 영감님 댁 할머니. 영감님은 가신지 올해가 10 년. 10 년이 금방이다. 오늘도 잘라낸 고춧대에서 마른 고추를 따서 한 개 한 개 정성드레 가위로 손질해 부대에 담는다. 자식들은 말려도 희나리 고추를 모으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늙은이 마음이다. 88세.
손 털었다? 개운하다. 마늘과 양파 농사는 이제부터 내년 6월까지 기다리면 된다. 동밭과 서밭이라 부르는 두 군데 짜투리 밭에 오늘로서 호남마늘과 자주양파를 다 심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웃에서 육쪽마늘을 심고 종자가 남으면 나에게 주기로 약속했기에 '먹다남은 개떡' 처럼 어정쩡하게 빈자리를 남겨두었는데 날은 추워지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모종시장에서 자주양파 모종 한 단을 사와서 마저 심어버린 것. 약속했던 본인들이 아무런 이야기를 않는데 가을걷이에 바쁜 사람들 붙들고 마늘종자 남았냐고 새삼 물어볼 수도 없어 아예 단안을 내려버렸던 것이다. 실은 호남마늘 종자도 버갯속영감님 댁에서 심고 남은 걸 얻어왔던 것이었다. 쪽파, 양파, 마늘 등등 남은 종자는 흔히들 이웃에 나누어 주는 미..
햅쌀...한 자루 안마을 버갯속영감님 댁에서 올해도 햅쌀을 한 자루 보내왔다. 얼마전 만났을 때 올핸 추석명절이 빨라서 햅쌀 수확을 걱정하더니 벼베기에서 도정까지 바쁜 걸음치며 가까스로 맞춘 모양이다. 올핸 햅쌀 밥맛이 어떨까?
눈 길, 걷다보니 만 보를 걸었다 오늘도 눈발이 날린다. 한낮에도 빙점 아래를 맴돌던 날씨가 그나마 풀렸다. 도내저수지 방죽 앞뜰을 걸었다. 올 겨울엔 눈이 풍성하다. 그동안 내린 눈이 그대로 쌓였다. 사각사각... 뽀드득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걷는 눈 길은 오랜 만이다. 어쩌다 신발에 눈덩이가 들어가 발이 시리다. 경사진 곳은 미끄럽다. 신경을 쓰다보니 보폭이 짧다. 평소 같으면 8천 본데도 만보계 숫자가 더 올라가는 이유다. 지난 가을 장마가 끝날 무렵 어느날, 무궁화 묘목 두 그루를 안마을 팔각정 입구 양쪽에 심었다. 발걸음이 오늘따라 그 쪽으로 갔다. 팔각정에 가까이 붙여 심었다며 봄이 되면 버갯속영감님댁 김 계장이 옮겨 심어주기로 한 무궁화. 봄을 기다리며 잘 있다.
책력을 해마다 사는 이유? 농가에 책력 없다고 농사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옛 어른들처럼 세시 풍속으로 책력 뒷 표지에 게재된 '작괘 조견표' 따라 태세 월건 일진을 따져가며 토정비결 운세를 볼 일도, 봐줄 일도 없다. 17년 전, 도내리 여기에 귀촌해 버갯속영감님을 만나고부터 새해 달력이 나돌 무렵이면 서울 동대문 보석상에서 나오는 일력을 친지들 인편에 수소문해서 구해다 버갯속영감님에게 드렸다. 버갯속영감님은 읍내 서점에서 책력을 두 개 사서 한 권을 나에게 답례 선물로 주셨다. 10년 전 타계하신 뒤론 내가 직접 구입한다. 3천 원 하던 책력이 지금은 5천 원이다. 송구영신... 세모 이맘 때, 책력을 살 때마다 버갯속영감님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