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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56화) " 소감 한마디씩 들어봅시다! "

56.

 

 

가을에 접어들어 그룹의 회장단 일정에는 공장 투어가 있었다. 회장단의 생산 현장 체험의 기회이자 우수 사례 공유의 장으로 활용했다.

 

선대 구자경 회장 재임 때는 그룹사의 ' 공장 자동화시설 투자 우수현장 '을 중점적으로 둘러보았다. 아들 구본무 회장 체제가 되면서 혁신 사례중심의 ' 실체변혁 현장 ' 격려로 성격이 달라지고 격년으로 바뀌었다.

 

격년 중간에 이희종 산전CU 부회장이 혁신 담당 임원과 관리자를 인솔하여 진행하는 형식으로 결정되었다. 이 부회장은 회장단에서 개발 기술분야의 전문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95년은 LG에 큰 변화가 있었다.  년초 시무식에서 <럭키금성>에서 LG로 바뀌고 ‘ 제2 혁신의 원년 '으로 선포하였다. 3월, 구본무 회장 체제가 출범하였다.

 

여의도에  <LG 트윈타워>를 신축하여 그룹 사옥을 서울역 앞 <역전 빌딩>에서 이전한지 10년이다. 1988년부터 구자경 회장이 추진해온 <F-88>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도약의 전기를 맞이 했다.

 

<행동 규범> 제정, <고객의 달>의 운영, < 윤리 규범>을 제정하는 한편, 대내외적으로 <정도경영>을  선포했다.  트윈 타워 동관과 서관을 잇는 로턴다 홀은 이런저런 이벤트로 활기가 넘쳤다.

 

The Face of the Future의 심볼.  LG.   세계, 미래, 젊음, 인간, 기술... 다섯 가지의 개념을 형상화하여 그룹의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 <인간 존중의 경영>을 부각시켰다.

 

 

 

 

 

 

 

 

95년도 회장단 <실체변혁 현장 투어 > 시찰은 10월 4일부터 2박 3일. 구본무 회장의 신 체제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첫 공장 순방이었다.

 

구본무, 허창수 회장을 비롯한 그룹 회장단, CU장, 각 사의 혁신 기획담당 임원 등 6십 명이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주차장에 집결하여 대형 버스 두 대에 분승해서 출발하였다.

 

산전CU는 이희종 부회장, 이종수 사장, 하니웰의 권태웅 사장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4 명이었다. 산전CU는 첫날 일정에 청주공장이, 끝 날의 마지막 일정에 창원공장이 들어있어 2개 공장이 투어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첫날 오전은 LG개발이 참여하는 서해 대교 건설 현장과 평택 인근의 국가 공단을 거쳐 오후가 청주 지역이었다. 청주 제 4공단은 ‘ LG 타운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자매사 공장이 많았다.

 

청주에서 일정은 LG전자의 마그네테크, LG반도체, LG화학의 LG생활건강 공장 순 이었다. 산전의 청주공장이 맨 마지막으로 잡혀 있었다.

네 공장은 생산 현장의 규모와 성격이 달랐다. 최첨단의 반도체에서 테이프, 비누 치약 장판지 벽지 등, 생활 용품에서 산업용 전기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첫날은 강행군이었다. 숙소로 정한 유성 그랜드호텔까지 빠듯한 일정을 맞추느라 여유가 없었다. 이동하는 시간을 감안하여 현장 투어는 한 시간 이내로 끝내야 했다.

 

그룹의 최고 어른들이 대규모로 현장 순방은 일찍이 없었다. 현장 실무자들로서는 그룹 어른들을 맞이하는데 준비한 노력에 비해 아쉬운 시간이었다.

 

각 사의 사장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차없는 평가였다. 회장단의 눈과 입은 사장의 입장에서 기회의 순간이자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두 대의 버스가 현장에 도착하면 일행을 대 회의실로 안내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장으로 바로 직행했다. 전반적인 현황을 듣고 두 팀으로 나눈 일행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가면서 군데 군데 마련된 주요 포스트에서 현장 책임자의 설명을 듣고 회장단이 질문하는 진행이었다. 

 

성공 사례 발표가 자화자찬이듯이 긴장하면서도 분위기는 경쟁적으로 고무되었다. 현장 실무자의 설명이 미덥지 않으면 아예 브리핑 스틱을 빼앗아 사장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마지막 일정인 산전 청주공장 차례가 가까워 올수록 나도 조바심이 일었다. 중간에 진행하고 있는 공장의 좋은 점이 눈에 띄면 즉석에서 전화로 알려 재빨리 참고하게 했다.

물수건을 준비하는 위치와 시찰하는 동선에 불필요하게 수행하는 현장 관리자 숫자를 최대한 줄이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드디어 산전 청주 1공장 식당 앞에 두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예정된 네 시가 훌쩍 넘었다. 원래의 계획은 4시부터 50분간이었다.

본관 상황실에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현장에서 가까운 G동 앞에 상황판을 설치하였다. 노천이라 짜임새 면에서 첫 인상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

 

당초 계획에는 연수원을 포함시키기로 했다가 시간 관계로 뺐다. 산전 연수원은 최근 신축해 시설면에서 다른 CU에 단연 앞섰다. 하루 전날, 행사 진행 그룹 실무자들과 최종 협의 과정에 바뀌었다.

 

 

 

전력기기 사업그룹장인 서정균 전무가 공장 전체 브리핑을 했다. 앞자리 쪽으로 의자를 준비하였으나 앉는 사람은 없었다. 의자를 앞에 비워둔 채로 엉거주춤 둘러섰다.

구본무 회장 옆에는 또 한 사람의 회장인 허창수 회장이다. 산전 부사장으로 3년간 재직하다 그룹 회장이 된지 일 년 만이라 달라진 위상에 산전인들의 시야에서 달리 돋보였다.

 

앉아야 할 분들이 차분하게 앉질 않으면 브리핑 당사자는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정해진 시간을 벗어나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다음이라 그럴수록 심리적으로 쫓기며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해는 뉘엿뉘엿 G동의 그림자가 A동 서쪽 벽에 걸렸다. 황량한 가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서 전무의 브리핑의 속도가 빨라졌다. 말 뒤끝도 얼버무렸다. 본래 경상도 대구 태생의 말씨에다 브리핑에 어울리게 매끄러운 언어구사는 아니었다.

 

줄줄이 늘어선 상황판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일부 사장들이 지루한 기색을 나타냈다. 그 순간 투어를 총괄하는 회장실 팀장이 사인을 보냈다. 간략히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지나치게 생략하면 건성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 브리핑하는 입장에서 진퇴양난이었다.

 

 

일행들의 라인투어에 앞서 이헌조 인화원 회장이 G동 입구에 진열된 'WHM(전력양계)의 변천사'를 알아보는 전시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2십여 년 전 금성계전 창립 초기에 부사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듯 느긋한 모습이 일행 중에 내 시선에 포착된 유일한 관심의 표출이었다.

 

 

이어 일행은 정해진 투어 코스를 따라 돌았다. G동은 <전력양계>  <전기 개폐기> 그리고 <저압 차단기> 라인이었다. 제품별로 공장장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가 각자 소관 라인을 직접 소개했다.

 

라인이 바뀔 때마다 설명자가 바뀌는 형국이었다. 그 때마다 인수 인계의 타이밍이 매끄럽지 못했다. 서 전무가 일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른 회사들처럼 이종수 사장이 직접 나설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서 전무가 반대했다. 현장을 잘 아는 공장장들이 각자 설명을 해야 한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개폐기 자동화 라인 주위에 작업자 2, 3 명이 붙어있었다. 일행 중에 누군가 질문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자동화 라인이라면서 인력이 이렇게 있을 필요가 있어요? ”

 

 

실은 투어 직전에 갑자기 트러블이 생겼다. 2 십여 미터나 되는 전자 개폐기 라인이 완전히 서 버렸다. 당황한 가운데 가까스로 수리했으나 혼란스러웠다. 혼인 날 받아 놓고 등창 난다더니 이럴 때 이런 상황은 오늘따라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룹 내에서 ' 생산라인의 자동화 '라면 단연 산전 청주공장이었다. 부산 동래공장에서 제조 현장에서  후계수업을 시작한 구자경 회장은 청주 인근에 오면 사전 연락도 없이 들러 신규 투자한 자동화 라인을 확인하고 칭찬했다. 이런 평판에 그룹의 자매사 공장에 알려져 견학 오는 사원들로 항상 붐볐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새벽부터 강행군으로 회장단은 피곤했다. 첫날의 숙박지인 유성에 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투어를 진행하는 회장실 실무자들은 일정 관리를 서둘렀다.

 

50 분으로 잡혀 있던 현장 투어가 30 분으로 끝났다. 앞서 다른 공장은 시간이 지체됐으나 청주공장으로서는 늦게 도착하여 일찍 떠난 형국이었다. 빨리 끝난 데 대해 안도했으나 뭔가 뒤끝이 뒤숭숭했다.

 

 

 

청주공장에 대한 평가는 유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판가름이 났다. 첫날 하루동안 둘러 본 각 사업장의 평가가 자연스럽게 있었다.

 

청주공장이 마지막이라 단연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종합을 해서 재구성을 해보면 산전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 산전이 무언가 하긴 하는 것 같은데 초점이 보이지 않는다... 설명하는 실무자나 안내자도 자신감이 없다... 현장 작업장의 조명이 밝지가 않다... ’

 

지적 사항이 봇물을 이루었다. 바로 당일이라 지나온 사업장 별로 우열에 대한 비교 평가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사장들 중에도 주류가 있었다. 입쌀이 매운 사장 중에 누군가가 선도하는 분위기에 따라 어느 한쪽 쏠림이 있기 십상이었다. 

 

 

구본무 그룹 회장과 같은 버스에 동승한 이희종 부회장이나 이종수 CU장은 바늘방석에 앉아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청주공장에서 하는 보고이지만 산전CU 전체의 관점에서 혁신활동의 요약이 빠졌다. 이 부분은 나도 간과한 대목이었다.

 

 

 

 

저녁식사는 숙박 장소인 그랜드호텔 2층 중국 식당이었다. 이날 참여한 60여 명이 모두 모였다. 열 개 테이블로 나뉘어 앉았다. 시찰 첫날의 결과를 화제로 이야기가 오갔다. 이날 성적표가 여론으로 굳어질 조짐이었다.

 

식당 전면 한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때마침 LG트윈스의 야구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간혹 트윈스 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이 쏠리면서 박수나 함성 탄식이 어우러졌다. 여유로움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산전 참석자들은 그 축에 끼지 못했다. 나는 뒤쪽을 둘러보니 이희종 부회장은 평소 무뚝뚝한 성격을 감안해도 표정이 어두웠다. 주위의 사람들과 별 대화도 없는 듯했다.

 

나도 청주공장서 일어난 해프닝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흥이 날리 만무했다.

 

‘ 하필이면 자동화 라인이 그 때 고장이 나나. ’

 

 

 

이 술 저 술 가릴 것 없이 꽤나 많은 잔이 급히 오갔다. 물을 만난 듯 권태웅 하니웰 사장만이 활발히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 저쪽 자리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다.

 

이종수 CU장은 이날 투어에 해당된 회사라 맨 앞 구본무 회장과 같은 메인 테이블이었다. 역시 이날의 투어가 화제가 이어지는 듯 얼굴은 굳어 있었다.

 

 

 

“ 산전은 그 동안 뭘 했습니까? "

 

구본무 회장이 불쑥 한마디 했다. 좌중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였다. 잔뜩 그 쪽에 신경이 가 있던 터라 더 크게 들렸을 법했다. 앞뒤의 대화는 알 수 없는 거두절미한 물음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 ... 그리고 투자 좀 하세요. 스피커를 매달아 끌고 다니 곳이 아직도 있어요? 촌스럽게... ”

 

연이어 구 회장은 거침 없었다.  ' 산전은 왜 이 모양이야! ' 하는 뜻으로 들렸다.

 

 

오늘 청주공장 현장 투어를 할 때 스피커를 이동 캐리어에다 매달아 싣고서 끌고 다녔다. 단체 현장 견학 자를 위한 이동용 무선 이어폰이 아니었다. 오늘 이미지의 결정적인 요인은 시찰 현장에서 사용한 스피커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희종 부회장을 힐책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지 않으면 좌중의 분위기를 깰 만큼 큰 소리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뭐라고 할 처지가 못되었다. 자리가 저 쪽 뒤편이었다.

 

 

“ ... ... 시간을 주십시오. 해내겠습니다. ”

 

이종수 CU장이 대답을 했다.

 

“ 2년만 하면 되겠어요? 한번 두고 봅시다. ”

 

 

 

 

식사는 거의 끝날 무렵 술잔만이 왔다갔다할 즈음이었다. 구본무 회장이 제안을 했다.

 

“ 임원들이 많이 왔는데...  오늘 소감 한 마디씩 들어봅시다. 뭐, 건의 사항도 좋고.... ”

 

각 사의 실무 임원 10여 명이 앞자리부터 앉은 순서대로 단상으로 나갔다. 나는 비교적 메인 테이블과 가까운 앞자리에 있었다. 세 번째로 등단했다.

 

“ 산전이 바로 한달 전에 산전 CU 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3사의 합병이 통합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시작과 더불어 오늘 여러 CU의 현장방문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산전은 사업내용이 다양하고 기술의 원천도 다릅니다. 공장도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업 문화를 한데 모으는 동질화 과정을 꾸준히 거쳐왔습니다.

 

비로소 이제 자신감을 얻는 시점에 왔습니다. 산전을 격려해 주십시오.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그런 뜻에서 통합 산전을 축하하고 앞날을 위해 큰 박수를 한 번 쳐주십시오. "

 

참석자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엎드려 끄집어낸 박수였다.

 

“ 그래, 축하해 주께. ”

 

앞쪽에 앉아 있던 화학의 성재갑 사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럴 땐 박수만 열심히 치고 가만히 계시는 게 어른답다고 생각했다.

 

 

산전을 위해 그룹의 어른들이 산전을 얼마나 이해하고 실로 무엇을 베풀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산전은 그룹의 전략적인 희생양이었다. 기회가 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정도로 그쳤다. 착찹한 기분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공허하기는 매 일반이었다.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뒤 켠에 앉아있는 이희종 부회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부회장은 빙긋 웃었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다소 펴는 듯 했다.

 

 

 

호텔 방 잠자리에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부터 전개될 상황이 그림을 그리듯 떠올랐다. 오늘의 잔재가 얼마나 이어질 지를 생각하며 뒤척거렸다.

 

 

다음 달 초 동관 대강당 <임원 월례 모임>에서 회장의 월례사로 거론될 것이다. < '95 회장단 실체변혁 현장투어 결과 보고서 >라는 안건으로 사장단 회의에서 재 탄생할 메뉴였다.

 

년말이면 임원 승진과 새해 사업계획을 보고하는 회장과 CU장 <컨센서스 미팅>에도 연결될 소재였다. ( 5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