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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55화) 마지막 대첩과 뉴 카머의 등장

55.

 

 

박 전무와 한판 격돌은 불가피했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세 고비 중에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던 것이다.

 

조직구조의 기본골격을 만드는 과정에 ‘ 해외사업 부문의 조직’과 ‘연구개발 부문의 조직’, 그리고 ‘기획기능과 심사기능’ 조직의 결정 과정을 나는 ‘에이플랜 3대 대첩’이라 불렀다. 상대는 해외사업부장 이병무 상무, 연구소장 이종명 상무였다. 이제 박충헌 전무다. 

 

 

 

94년 12월 14일. 년 말이라 하루 종일 회의였다. 오늘 경영회의는 오전과 오후에 각각 에이플랜 팀의 안건이 들어있다. 두 안건 모두 다 중요했다. 에이플랜 팀에 있어서 장래가 걸린 사안이다.

오전 안건인 ‘ 변혁의 추진 방향과 사업활성화 팀의 운영방안 ’이 전략적인 안건이라면 오후 안건은 전술적인 안건이었다. 본부 스태프의 역할을 설정하는 마무리 단계로 오후 회의는 경영회의 멤버 워크샵이다.

 

오늘 이종수 사장이 처음으로 산전에 얼굴을 보였다. 오전에 발표된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이종수 금성전자부품사장이 기전 사장 겸 산전의 부사장으로 발령을 받고 이희종 CU장에게 인사차 들렀다.

 

인사내용이 발표되자 장차 이희종 CU장의 후계자로 발탁되었다는 소문이 현실로 확인된 셈이다. 한 때 김회수 사장이 유력하다는 풍문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종수 사장으로 낙점되었다. 이희종 CU장이 후임 CU장을 골랐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희종 CU장은 ' 마침 오후에 에이플랜 워크샵이 있으니 참여해 보라 '고 이 사장에게 권했다. 이종수 사장은 정식 취임도 하기 전에 처음으로 산전의 임원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 인사에서 그룹의 회장이 된 허창수 부사장이 산전의 부사장으로 참석한 마지막 회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종수 사장과 자리를 맞바꾸게 된 김회수 사장이 금성 전자부품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므로 기전 사장으로서는 마지막 회의였다.

 

떠나는 허 부사장과 처음 찾아온 이종수 사장 사이에 엉거주춤하며 상석을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나 허 부사장이 그대로 앉았다. 

 

 

 

에이플랜에서 스탭 부문의 역할을 지금까지 ' 관리기능 '에서 ' 전략과 지원 '이라는 컨셉을 도입했다. 전사 조직의 명칭에서 ‘ 관리 ’라는 표현 자체를 없앴다. ‘ 관리 ’에서 ‘ 지원 ’으로 바꿨다.

에이플랜의 통합조직 설계에서 기본사상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영업부문인 사업그룹을 고객으로 보고 서비스의 지원 역할을 명확히 함으로서 조직운영 파라다임의 변화를 추구했다.

 

에이플랜에서 제안한 스탭 조직은 ‘ 전략지원기능 스탭 ’, ‘ 경영지원기능 스탭 ’, ‘ 사업지원기능 스탭 ’와 ‘ 사업운영지원 스탭 ’으로 구분하였다.

 

사업운영지원 스탭은 사업그룹과 사업유니트장 관할의 기획 영업지원 기능이다. 사업지원 기능 스탭은 사업 시너지 창출에 직접 가치를 제공하는 <연구소>를 비롯한 <디자인센터>, <A/S정보센터>, <생산기술센터>, <기술기획실>, <정보화 추진실>이 해당된다.

 

전략지원기능 스탭은 CEO의 직속으로 전사 방향 제시와 공통의 프로세스 시스템을 제공하고, 경영지원기능 스탭은 경영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서비스를 주요 기능으로 했다.

 

 

 

 

 

 

 

 

 

 

전략지원과 경영지원의 역할을 설정하면서 박 전무와 나 사이의 견해 차이가 발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심사기능이 초점이었다.

전사 기획기능인 심사 부서를 전략지원 기능에 포함시키고 회계와 자금, 경리, 인사, 업무, 홍보를 경영지원 기능으로 하자는 것이 에이플랜 팀의 제안이다. 박 전무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오늘의 안건은 지난 워크샵에서 토의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아 연기된 의안이었다. 지난 <에이플랜 스티어링 커미티>인 경영회의 멤버의 워크샵에서 사업그룹의 조직은 이미 결론이 났으나 본사 스태프는 미결인 채 넘어왔다.

결정이 보류되는 바람에 이후의 모든 에이플랜 프로젝트 일정이 실무적으로 쫓기고 있었다. 에이플랜 팀 리더인 나로서 더 미룰 수 없었다.

 

이 부분의 승인이 조직 설계에서 마지막 남은 결정 사항이었다. 3사 통합이라는 신조직 설계의 본질이자 조직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어서 사업부문에서도 태연한 척하면서 귀추에 관심을 보였다.

 

 

 

오후 일정의 워크샵이 시작하는 첫머리에  나는 참석자들에게 경과설명과 함께 오늘의 목적사항을 다시 한 번 주지를 시켰다. 그리고 에이플랜 팀이 제시하는 시안에 대해 오늘 워크샵에서 반드시 결론을 내 줄것을 주문했다.

 

지난 워크샵에서 이미 에이플랜 팀과 박충헌 전무와 논점이 분명했으므로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참석자들의 시선이 박 전무 쪽으로 쏠렸다. 평소 박 전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함축된 시선이었다.

오늘은 박 전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심이었다.  박 전무의 반응에 주목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음인가. 박 전무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정면을 응시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지난번에 토론에서 장시간 한번 거른 의제인 데다 사업본부장들로서는 다소 김이 빠진듯 간여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은 사업부로서도 중요한 의제였다. 한편으로는 중립적 입장의 견지로도 보였다.

심정적으로 에이플랜 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박 전무를 의식하고 있었다. 관리부문에서 따지고 걸고 넘어지면 언제나 고달픈 곳이 사업부 쪽이었다. 지난날 수없이 경험한 사례에서 터득한 피해의식이다.

 

 

 

이희종 CU장도 묵묵히 앉아있기 만 할 뿐이었다. 흔히 이럴 때 CU장은 한동안 마냥 두고 보았다. 오히려 숨이 막히는 그런 순간이다. 오늘도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는 테마에 대해서 CU장은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허창수 부사장은 중간에 자리를 떴다. 그로서는 산전CU에서 퇴장하는 역사적인 마지막 회의였다. 김회수 사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백중영 계전 사장은 멋쩍어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여러 시선과 마주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내보라는 암시였다. 권태웅 하니웰 사장은 굵은 검은테 안경을 한 손으로 눌러가며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였다.

 

참석자들은 각양각색의 자세로 갑갑함을 달랬다.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들이 오늘 워크샵에 임하는 심사를 그대로 반영했다.

 

 

마침내 구정길 전무가 정적을 깼다. 지나가는 말처럼 눙치며 거들었다.

 

“ 박 전무, 왜 가만히 있소? ”

 

박 전무는 못들은 척 꼿꼿이 앉아있었다.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흔들어 자기가 말할 차례가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 왜, 한 마디 하소! 박 전무.”

 

구 전무의 연이은 독촉이었다. 

 

그러자 박 전무는 두 눈을 여전히 아래로 깐 채 운을 뗐다.

 

“ 에이플랜에서 조직을 너무 세분하고 있습니다.... 세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그리고 무언가 말을 이어갈 듯 하다 중단했다. 평소 발언을 할 때는 모양새 갖추어 총기 있게 보이려 하던 박 전무도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눌린 모습이었다.

 

‘ 또 그 고집을 부리는군. ’ 하는 몇몇 임원들의 시니컬한 시선과 박 전무의 표정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실내는 다시 진공상태가 되었다.

 

 

내가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늘 워크샵에서 진행자 겸 제안자였다. 말꼬리를 붙들어서라도 결론을 내려야할 판이다. 더 이상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겸 원론적인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우리 조직 내에서는 영업 사업부문의 사업부가 고객입니다. 고객을 위해 각 사업부 별로 전문화하자는 겁니다. 사업 하나 하나에 가치를 부여하자. 사업이든 직무이든 창출할 가치와 일의 미션에 따라 영역을 명확히 설정해주자. 이런 거지요.

 

뭉뚱그려 놓으니 의무와 책임 한계가 불분명해지고 성과 측정도 어렵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실상입니다. 이미 통합 조직의 배경과 사상에 대해서는 수많은 토론으로 공유가 된 내용입니다. 이걸 오늘 재론하면 일 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

 

 

그러자 박 전무가 말했다. 역시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마지막 변론처럼 보였다.

 

“ 심사는 사업계획 수립을 포함하여 자금, 경리, 회계와 밀접합니다. 경리, 회계를 통해 자료가 나와야 심사의 일이 됩니다. 모두가 숫자를 다루는 일입니다. 관리의 시너지를 위해 서로 관련이 있고 효율적으로 협업이 가능한 데로 모아주어야 합니다. ”

 

 

나는 말을 되받았다.

 

“ 그럴수록 분리해야 합니다. 자칫 한 통속이 되면 ‘ 견제와 균형 ’ 이라는 조직운영의 대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경리와 회계는 지나간 어제의 관리이고, 심사는 내일의 초석을 다지는 지원입니다. 

전략과 기획, 비전이 숫자로만 됩니까. 조직의 운영을 숫자로만 해석하는 발상은 곤란합니다. 그런 고정관념 자체가 위험합니다. ”

 

 

“ 거기다가 장기 단기까지 구분하다 보면 조직이 너무 나누어지는 것 아닙니까? ”

 

 

“ 단기 사업계획과 장기 전략과 비전에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 년의 사업계획은 장기전략 중에 단기 계획입니다. 모두가 비전을 실현해 가는 일환입니다. 거기에는 일관성 유지가 관건입니다. 우리 산전의 취약점이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통제 관리하려고 만 하지 마십시오.

 

이젠 역전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본부가 정보나 직무지식, 스킬, 기획 등 모든 면에서 앞섰습니다마는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사업부가 따라왔고 오히려 본부 스탭이 뒤쳐졌습니다. ”

 

 

 

 

 

사실 그랬다. 올해 초(94년)  4월 28일에 실시한 각 사업부의 기획부 과장을 대상( 50명 )으로 한 설문조사가 있다.

 

-  고객인 사업부문에서 볼 때 스탭 부문의 스킬이 매우 낮고 업무 스타일에서 매우 관리 통제적이어서 서비스의 만족도에서 불만족으로 나타났다.

특히 인사, 전략 기획, 경영심사가 만족도에서 모두 평균 이하였다. 숫자만 집계하고 실적 만 따지는 이미지의 스탭은 이젠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였다.

 

더욱이 선전CU 3사인 산전, 계전, 기전의 스탭 부문을 단순히 합치면 692명으로 국내 영업 부문 650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사 스탭이 300명으로 3.1%를 차지했다. 그룹 내 평균 2.4%에 비해 높았다.

 

따라서 조직설계 시의 주요 고려사항이 소수정예화와 작은 본사의 실현이었다. 스탭부서의 숫자는 줄이고 서비스는 올려야 한다는 과제 만 남았다. -

 

 

 

토론의 종착점 가까이 왔는가 했는데 박 전무가 지난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다시 불씨가 살아났다. 

 

 

박충헌 전무 주장의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계산과 피해의식이 깔려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조직 기능과 인력을 데리고 있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감추고 있었다. 조직의 운영을 전사 차원에서 시스템적으로 바라보는 발상이 아니었다.

 

' 에이플랜 팀이 자기를 젖혀 놓았다.'는 불만을 토로한다는 소리가 그동안 여러 곳을 통해 나에게 들렸다. 연수원, 감사실 조직까지도 사장 직속으로 갖다 붙여 자신의 위치를 희미하게 했다는 불평도 들려왔다.

 

한마디로 내가 개인 감정으로 자기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에이플랜 팀이 주장하는 조직 안이 박 전무 개인의 진로를 방해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차의 ‘ 전략경영지원 그룹장 ’으로 대우하고 부각 안 시키는 서운한 감정이었다. 그 동안의 에이플랜 워크샵 과정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낸 적이 없잖아 있었다. 이런 저런 기회에 오해를 풀려고 화제를 꺼내면 새삼스레 기를 쓰고 천연덕스럽게 그런 사실을 부인했다.

 

 

 

 

“ 수시로 찾아가십시오. 박 전무와 친하십시오. ”

 

박 전무 소속의 실무자들이 가끔 노골적으로 내게 말했다. 주위에 있는 관리자들이 분위기를 잘 알았다. 현재 자신의 상위자인 박 전무를 곰살스럽게 대우하지 않는 데 대한 충고였다. 자신들이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 여러 번 만났어.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찾아 가. 그러나 지금은 그럴 일이 없어. ”

 

“ 구뎅이가 무서워서 피합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

 

“ 어린애 같은 소리구마.  개인적인 복선은 안돼! 큰 흐름 큰 틀을 봐야돼.”

 

“ 그 양반 성격 잘 알지 않습니까. 언젠 간 당합니다. ”

 

일부 관리자들은 이런 말도 서슴지 않았다. 

 

“ 공갈 협박하나? 그런 소리하지 마. ”

 

이렇게 말하며 나는 웃고 말았다.

 

“ 한쪽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어떡합니까? ”

 

“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비위나 맞추기 시작하면 에이플랜은 끝이야! 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심으로 에이플랜을 생각한 적이 없어.

 

때로는 이렇게 짐짓 화를 내기도 했다. 실제로 드러나는 박 전무의 피해의식, 서운함, 오해는 끝이 없어 보였다.

보는 관점이 그 사람과는 분명 달랐다. 평소 박 전무의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본부 스탭의 조직에 대한 이번 문제 뿐 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의 기조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개인적인 아집에 보편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일관되게 박 전무의 주장을 반박했다. 조직을 자기 위주로 보는 시각은 에이플랜 프로젝트를 다루는 나로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박 전무와 나 사이의 미묘한 견해차이에서 심정적으로 나를 옹호하는 편이 많았다. 개성의 차이를 산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더욱이 박 전무와 나 사이에서 벌어졌던 과거사랄지 해프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시각 때문에 본부 스탭의 조직에 대한 이날의 공방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의 대결 구도로 보았다.

 

다른 참석자들은 여전히 여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더우기 오늘 워크샵은 물러가는 사람 새로 오는 사람들이 뒤엉킨 자리여서 더욱 그랬다.

 

둘만의 공방이 오갔다.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박 전무의 고집은 이미 설득력이 없어 회의는 지루하게 흘러갈 조짐이었다.

 

 

 

바로 내 앞줄에 앉아있던 이종수 사장이 두어 번 머리를 돌려서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마치 ‘ 어떤 사람이 이렇게 주의 주장이 센가? ’하는 눈빛이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 이 사장 생각은 어때요?...  전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

 

이희종 CU장이 가볍게 이종수 사장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CU장으로서 일종의 국면 전환이었다.

 

“ 단기와 장기는 구분되는 것이 맞다 고 봅니다. 지금까지 관리기능인 사업지원의 서비스 업무와 전략 기획은 달리 운영해야 합니다. 전자에서도 이 조직에 기능과 담당 임원이 다릅니다. 다만 조직의 크기가 전자와 산전이 다르니까 일률적으로 확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습니다... ”

 

이 사장은 의자를 돌려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 앞으로의 방향이 그 쪽이니 장래를 보아야하질 않겠습니까. ”

 

바로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내용이었다. 오늘 공방의 결론이나 다름없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듯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자 박 전무가 말했다.

 

“ 기본적으로 김 상무 주장대로 하는 걸로 하지요. ”

 

이종수 사장의 견해에 동조하는 발 빠른 변신이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박 전무는 말을 이었다.

 

“ 다만... 우리 3사 통합 조직이 이제 처음 출범하기 때문에 당분간 현재대로 하고  1년 뒤 향후에  에이플랜 안으로 시행했으면 합니다. ”

 

“ 시작할 때 제대로 해야 합니다. 조직운영은 한번 주름이 지면 펴기 힘듭니다. 전 반댑니다. 이건 타협할 성질이 아닙니다. ”

 

나는 용수철 튀듯이 이를 제지했다.

 

난처해진 이희종 CU장이었다. 이종수 사장의 견해를 듣고 결론을 낼 듯 하다가 박 전무의 후렴에 엉거주춤했다. 다시 나의 주장에 회의 분위기는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 내년에 해야 할 일이면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미적지근하게 마무리할 성질이 아니었다.

 

CU장은 또 말문을 닫았다. 비스듬한 자세로 몇 번인가 눈을 껌벅껌벅 하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장내는 긴장감에 싸였다. 비비꼬이는 회의의 흐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CU장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귀추를 주목했다.

 

“ 김 이사의 말이 맞아... ”

 

CU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말했다. 이어질 말이 있는 듯 말끝이 명쾌하지 않아 잠시 긴장이 증폭되었다.

 

“ 그런데... 일 년이니까... 박 전무 말대로 해보다가 내년에 시행하는 걸로 하지. 김 이사가 오늘 양보해. ”

 

CU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젠 장내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 ............... ”

 

양보나 타협으로 결정해야 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 그렇게 하지. ”

 

CU장은 나를 쳐다보며 채근했다.

 

“ ............... ”

 

더 이상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힘이 빠졌다. 봉합이었다.

 

 

 

- - - - - - - - - 

 

 

 

이것이 함정이었다. 결국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지켜질 약속이 아니었다. 이희종 CU장의 판단 착오이자 나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남았다.

 

어떤 조직을 만들고 어떻게 후배들을 키워야 하는가. 인재육성과 조직운영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는 산전의 운명이 걸린 사례였다.

 

이후 이희종 CU장은 나에게 자주 이종수 사장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이 후임 CU장으로 낙점된 사실을 뒷받침했다. 이종수 사장은 이 사장대로 부담스러워 했다. 

 

산전의 신참자로서 스스로를 ' 뉴 카머(New Comer) '로 자처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겸손의 표시이나 색깔을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함이 답답하게 했다.

 

에이플랜의 히스토리와 배경을 단 시일에, 그리고 산전CU를 단숨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수록 참모로서 옆에서 길잡이를 잘 해야 했다. 

 

 

 

이날 에이플랜 워크샵 와중에 이종수 장래의 CU장과 에이플랜 팀과 상견례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것은 어떤 운명이었다. 박 전무와 논쟁을 하고 있는 과정에 나를 향해 되돌아 보는 표정... 

 

나는 이종수 사장에 대해 금성사에 그런 분이 있다는 말도 성함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룹 인사를 앞두고 사전 흔히 흘러다니는 풍문도 없었다. 인사 발표가 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몇 가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구자경 회장이 70세가 되는 내년 쯤 있을지도 모를 승계작업에 아들 구본무 회장체제가 출범하면 구본무 친정 체제의 핵심의 일원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금성사의 일본 주재원 시절에 구본무 회장과 같이 일본에 근무하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성사에서 엘리베이터 사업부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산전과 굳이 인연을 엮자면 엘리베이터 사업의 경험이 있다는 정도에서 산전의 공감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술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말은 공통적으로 여기저기서 나왔다. 호인풍이라는 평가와  함께 만물박사라든가, 잡학 백과사전이라고도 했다.

 

이중칠 전무와 금성사 입사 동기라는 말도 들렸다. 한편으로 입사 동기가 전무로 있는데 사장으로... 장본인들은 그렇다치고 주위의 시선이 불편한 일이다. 이종수 사장의 등장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김회수 사장을 밀어내고 백중영 사장을 제치고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희종 CU장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가 궁금했다. 

 

 

 

" 사람만 좋아 가지고... "

 

" ............... ? "

 

" 역시 약하지?  약해! "

 

나의 동의를 구하듯이 조용하게 말했다. 

 

" ............... "

 

골프를 치다가 그늘집에서 우연히 이희종 부회장과 나눈 대화였다. 이종수 사장에게 CU장을 물려준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종수.  ' 뉴카머 '의 등장으로 산전 본질을 추구하는 데 따른 나의 원초적인 의문이 되살아났다. 여전히 산전은 없었다. 외부에서 수입해야 하는 산전의 비운. '신탁통치'의 연장선에서 산전은 전철을 반복하고 있다. (5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