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49화) 성공체험 만들기 1,2

49.

 

최종 보고회의 뒤풀이는 중간 보고 때와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오늘 최종 보고회를 끝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킨지와 V-본부, 그리고 산전CU의 에이플랜 팀 2십여 명이 모두 모였다.

 

 

“ 우리의 배전반 사업은 주력 중에서 원조 주력입니다. 분명히 이번에는 될 겁니다. ”

 

이희종 CU장의 ‘원조 주력’ 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했다. 

 

 

 

“ 죄송했습니다. 부담을 드린 것을 사과 드립니다. ”

 

후지모토가 일어서더니 일찌감치 한 마디를 했다. 두 달 전 중간 보고회가 끝난 다음 자신의 경솔했던 눈물 사건을 새삼 되살렸다.

 

“ 역시 울어야 돼. ”

 

“ 매킨지가 우니까 일이 잘 됐잖아. ”

 

“ 무슨 소리야. 우는 놈이 있어야 웃는 놈도 있어. ”

 

다들 말들을 쏟아냈다. 한바탕 왁자지껄 어수선했다.

 

“ 후지모토야 우지마라! 팀 리더가 있다. ”

 

이 말이 폭소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날 뒤풀이의 초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오늘의 주빈은 후지모토야. ”

 

나는 후지모토를 내 옆에 불러 앉혔다. 

 

특이한 '주빈'이 탄생되었다. 오늘처럼 여론에 따라 정한 건 처음이다. 이번 배전반 프로젝트의 리더는 윤용호이나 보고자는 사업부장이라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의 주빈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오늘 ‘주빈’은 단연 후지모토라는데 이론이 없었다. 

 

“ 수고했습니다. 당신의 열정에 모두 감동을 받았어요. 사과를 할 일이 아니오. 진정 우리가 사과를 했어야 할 일이요. ”

 

나는 후지모토의 소주잔에 소주를 듬뿍 따랐다. 후지모토는 큰 덩치를 연신 꾸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검은 안경테 너머로 작은 눈가에 어리는 물기가 반짝거렸다.

 

 

 

 

 

 

에이플랜 팀에게 보고회 날은 어느때부터인가 이심전심으로 ‘ 主賓의 날 ’로 통했다. 나는 그 날은 반드시 회식의 ‘ 주빈 ’을 정해 특별히 격려해 주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당일 보고를 맡았던 에이플랜 멤버가 그 날의 ‘ 주빈 ’이었다.

 

에이플랜 팀에서는 경영회의에서 처음으로 보고하면 ‘ 데뷔했다 ’고 말했다. 보고회 날이 ‘ 주빈의 날 ’이자 ‘ 데뷔 날 ’이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스타 탄생의 영광과 감격을 간직하도록 재미삼아 이렇게 명명을 했던 것이다. 일종의 '영웅 만들기' 였다.

 

 

나는 회식에서 아무데나 앉았다. 반드시 한 가운데가 어디라도 팀 리더인 내가 앉는 곳이 상석으로 여길 따름이었다. 주빈은 나와 같이 나란히 앉고 내가 맨 먼저 소주를 권했다. 그 날의 스타로 만들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모든 멤버들이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데뷔전을 치루기까지 흘린 땀은 에이플랜의 동료들 만이 경험으로 알았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다. 보고 내용과 보고자로서 능력이 판가름 나기 때문에 책임감이 피를 말렸다.

보고 자체가 바로 승패가 나는 게임 같았다. 에이플랜 팀이라는 자존심과 어우러져 저절로 경쟁심과 책임감이 솟아났다.

 

보고회가 칭찬과 격려로 마무리가 되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고생한 보람이 온 몸을 달구었다. 장본인이 아니고는 형언할 수가 희열이 있었다.

반면에 보고가 매끄럽지 않거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원치 않을 경우 아쉬움이 남았다. 모두가 본인들의 몫이었다. 누가 판가름을 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평가가 나왔다.

 

주빈에게 술잔이 쏠리기 마련이다. 잘 했다면 잘 한대로 미진했다면 미진한 대로 축하와 격려의 술잔이 이어졌다. 에이플랜 팀은 전문가 집단의 일원에서 사업 책임자로 자라날 산전 CU의 자원이다.

실수가 자신만의 치명적인 상처로 남지 않아야 했다. 가까운 시간 안에 ‘ 패자 부활전 ’의 기회를 주었다.

 

 

 

< 배전반 사업활성화 프로젝트 >에 참여했던 네 명을 모두 철수시키지 않았다. 윤용호 과장과 박주호 과장을 < F 팀 (Follow up-Team) >으로 남겨놓았다.

본 프로젝트의 추진보다 실행 과제의 실천이 즉, 팔로우 업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가름하는 관건이었다. 이후 모든 프로젝트에는 < F 팀 >을 운영하기로 했다. 정착될 때까지 담당했던 에이플랜 팀 멤버를 현지에 남겨두는 제도를 채택했다.

 

 

그동안 에이플랜 팀이 수행한 프로젝트는 프로젝트의 중요도와 규모에 따라 투입되는 인원에서 고참과 신참의 수를 배정했다. 예외적으로 어떨 때는 신참자들 만 한 팀을 만들어서 프로젝트를 수행시키기도 했다. 실험적으로 이렇게 해보기도 하고 저렇게 해 보기도 했다.

 

신참 팀이라고 해서 처음에 다소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길다는 점 외에는 고참 팀, 혼합 팀 그리고 신참 팀 간에 큰 차이는 없었다.

처음 뜸을 들이는 발효과정이 이들에게는 다양하게 생각을 하게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이 다소 길어진다고 해서 프로젝트의 전체 일정이 늘어지는 건 아니었다.

 

신참 팀은 팩키지 구성에서 조리 정연하지 못한 면이 있었으나 동료들의 조언으로 보완되었다. 오히려 신참자 팀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면에서 시각이 달랐다.

프로젝트 추진의 강도에서 힘이 넘쳤다. 몸을 던졌다. 경험의 부족을 참신한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보완했다.

 

테마에 따라 보고자가 달랐다. 경험을 쌓기 위해 테마 별 프로젝트 리더를 돌려가며 지명을 했다. 기회를 골고루 주었다. 모두는 언젠가는 프로젝트 리더가 되어 막대기를 들고 앞에 나서는 보고자가 되었다.

 

팀의 리더가 되어 짧게는 2 주, 길게는 한두 달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서 책임자로서 자신을 경험했다.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하는 기회였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리임을 확인 했다. 바로 스스로 ‘ 리더 ’이면서 ‘ 팔로우어 ’가 무엇인지를 터득했다.

 

 

 

다음해 배전반 사업이 만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김용철 이사는 상무로 조기 승진했다. 마침 ‘ 성과주의 문화의 정착 ’이라는 그룹의 방침과 맞물려 산전CU에서 임원 발탁인사의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

 

배전반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올랐고 사업부장은 승진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만년 적자로 주눅이 들었던 오산공장에 활기가 돌았다. 꿈 만 같은 성공 체험이었다.

 

 

사업부에서 어느 누구도 에이플랜 팀의 덕분이라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로지 에이플랜 팀만이 성취할 수 있는 확신 때문이다. 확신이라는 스스로의 가치에 당당해졌다. ‘ 후지모토의 눈물 사건 ’이 가져다 준 교훈이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한 순간에 지나갔다. (4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