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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47화) "누구의 회사입니까?"

47.

 

 

   “ 어째서 산전은 안 하려고 만 하는가? ”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20여 명이 다닥다닥 줄지어 마주 앉다 보면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순식간에 소주 몇 순배가 돈 다음이었다. 후지모토가 흥분해 있었다. 

 


   “ 후지모토가 갑자기?... ”


   “ 무슨 일이야? ”


   “ 왜 그래? ”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에이플랜 팀의 뒤풀이에서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에이플랜 팀에게 보고회는 그동안 프로젝트 별로 현장 사이트에 흩어져 있다가 다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였다. 보고회가 끝나면 늘 해왔던 것처럼 뒤풀이 저녁 회식 자리를 갖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에이플랜 팀 만의 공간인 뒤풀이. 2차로 가라오케 노래방으로 진출하는 건 필수 코스였다. 사기진작을 위해 기꺼이 나도 끝까지 동참해 마지 않았다.

 


   “ 오늘 보고회를 보세요! 제대로 발언을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


   내가 후지모토에게 시선이 가는 순간 다시 큰 소리가 이어졌다. 두꺼운 검은 안경테 너머로 두 줄기 눈물이 비쳤다. 


   “ 이 회사가 누구의 회사입니까? ”


   후지모토는 앞에 따라져 있던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94년 10월 25일이다. < 배전반 사업활성화 프로젝트 >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에이플랜 스티어링 커미티인 경영회의에서 중간 보고회를 했다. 

 

   후지모토는 매킨지 멤버 세 사람 중 선임자다. 에이플랜 추진 30개월을 우리와 같이 있을 사람으로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다. 

 

 

 


   나는 눈물 흘리는 후지모토의 심정에 다가갔다. 집히는 바가 있었다. 지난 두 달간 < 배전반사업의 활성화 >를 하는 과정에 후지모토는 간간이 오산공장의 분위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후지모토는 오늘 중간 보고회에서 배전반 사업 당사자들인 본부장과 사업부장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당사자 의식이 없다는 의미다.

 

   배전반 사업부의 영업과 생산의 오산공장이 잘 움직이지 않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88년도에 금성계전의 배전반과 금성기전의 배전반이 금성산전에 흡수 통합되었다. 당시 그룹의 < F-88 프로젝트 >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작업의 소산이었다.

 

( < F-88 프로젝트 >는 1990년 럭키금성 그룹의 ‘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 ’으로 확정 발표되었다. ) 


   기전 주안공장의 인력과 설비를 계전의 오산공장으로 이전하면서 배전반사업이 산전에 양도되었다. 일찌기 산전CU에서 통합의 물을 한번 먹은 사업이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역시 사람이었다. 근무지가 변경된다는 불만과 흡수된다는 심리적인 사기 저하를 이유로 기전 주안공장 출신 인력의 퇴사자가 속출했다. 한동안 인력과 생산 라인의 안정에 애를 먹었다. 

 

 
   계전 배전반은 일본의 후지전기가 기술의 원류이며 기전 배전반은 미쓰비시다. 게다가 이미 수백 개의 중소 배전반업체가 난립해 꼬시랭이 제 살 뜯어먹듯 경쟁적인 덤핑 수주로 피차 수익성 악화를 자초했다.

 

   게다가 선매출, 분기 말이나 년말 소나기 출하로 가라매출 적자발행과 취소, 재고 관리 부실 등의 중징계로 불명예 퇴직 사례가 많았다. 

 

 

   기술이 평준화되어 이젠 첨단 기술도 아닌 배전반 사업을 대기업으로서 산전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산업용 전기업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대형 빌딩일수록 대기업 제품을 선호했고 물량이 컸다. 배전반 시설이 없는 건물은 없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넘볼 수 없는 분체 도장 시설, 설계 생산자동화 CAD/CAM 등 대형 투자는 지속되었다. 

  
   외형상 총매출에 대한 기여도는 컸으나 수익성이 없는 사업이었다. 흑자화를 위해 경영기법은 다 써보았다. 결과는 적자의 연속이었다.

   사업부장을 비롯하여 관리자들은 해볼 건 다해봤다는 말로 대변했다. 백약이 무효라는 상실감에 짓눌렸다.

   

 

 

 

 

 

 

 


   94년 하반기와 95년 상반기까지 에이플랜 팀의 주요과제는 두 가지였다. < 통합 산전으로의 소프트 랜딩 > 구축 작업과 < 개별 사업의 활성화 > 추진이었다.

 

  < 사업활성화 프로젝트 >는 에이플랜 팀으로서는 2 단계의 작업이다. 

  
   94년 8월 25일. < 제1차 사업활성화 프로젝트 킥업 >이 있었다. 자판기의 < 쇼 케이스 사업 >과 < 플랜트의 배전반 사업 >을 사업활성화의 첫 대상 즉, <파일롯 프로젝트>로 결정했다.

 

  

   엘리베이터 사업과 전력기기 사업 다음으로 규모가 크면서 적자 사업이기에 먼저 에이플랜 팀을 투입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년 말까지 4개월의 일정이었다.

 

  적자사업의 흑자화가 목표다. < 플랜트의 배전반 사업 >에 다시 한번 극약 처방의 칼을 빼든 셈이다.

   

 

  
   < 쇼 케이스 팀 >은 최공범 부장, 이수인 부장, 노봉수 과장, 김종평 대리,  < 배전반 팀 >에는 박동원 부장, 윤용호 과장, 김연식 과장, 박주호 과장이 참여했다. 

 
   이수인은 지난 7월 에이플랜 팀에 합류한 후 첫 프로젝트였고, 윤용호는 오산공장 생산 현장에서 배전반의 품질관리를 담당했으므로 실정을 잘 아는 친정집 프로젝트다. 최공범, 김연식은 각각 기전과 산전의 엘리베이터 사업부 출신이었다. 

 


   < 쇼 케이스 팀 >,< 배전반 팀 > 두 팀 모두는 사업활성화 프로젝트가 갖는 중요성의 의미를 알았다. < 개별 사업의 활성화 >의 첫 케이스라는 사실에 긴장했다. 실력 발휘의 시험대였다. 

 

   긴장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이플랜 팀 개개인의 능력과 지금까지 축적한 에이플랜의 경험을 믿었다. 의욕도 충만했다.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동료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도 깔렸다. 나는 무엇보다 성공체험을 통해 자신감이라는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쇼 케이스 팀 >과 < 배전반 팀 >에는 매킨지에서 이상훈, 아라마끼, 후지모토가 각각 나누어 참여했다. 이상훈은 지난 6월에 합류한 매킨지 소속 한국 사람이었다.

 

   매킨지도 산전의 정서를 읽었다. 후지모토는 배전반 팀에 자원했다. 매킨지의 총괄 역할을 담당하는 후지모토가 스스로 자원한 만큼 < 배전반 사업활성화 프로젝트 >의 중요성을 알았다.

 
   후지모토는 지난 일 년 가까이 산전과 함께 하면서 산전과 사업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이해와 감각을 축적했다.

   배전반 사업은 산전의 역사를 같이 한 사업이었다. SWOT 분석에 따른 강약점을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산전의 현실을 답답해 했다. 

 

 
   그런 의미에서 후지모토의 배전반사업 프로젝트의 자원은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매킨지 팀의 선임자로서 도전이자 의미심장한 승부수였다. 

 

 



   통합 산전의 출범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산전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 신생 통합산전의 조직과 조직운영의 룰 >과 < 개별사업의 활성화 >를 병행했다.

 

 
   조직 설계의 과정에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사항들이 늘어났다. 격주 단위로 스티어링 커미티인 경영회의에 보고를 하는 일정이 계속되었다. 

 

   통합 조직의 설계를 지나 밑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직의 틀과 운영 룰의 윤곽이 잡혀갔다. 

  
   과도기였다. 이런 시기에 주요 사업에 대한 사업 활성화를 위해 마케팅 전략을 짜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94년에서 95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에이플랜 팀은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었다.

 


   “ 화장실에 가서 불알 빠뜨리고는 오지 말어. ”


   에이플랜 멤버들에게 이런 농담도 하면서 웃었다. 


 


   한편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영회의 멤버로서도 ‘짜증스런 일’이었다. 수없이 이어지는 보고회에 <의사결정 요망 사항>을 안건으로 올리며 에이플랜 팀이 '그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산전의 미래를 결정하는 내용이었다. 토의해서 즉각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 에이플랜은 다음 단계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토론과 의사결정, 그리고 보고회는 산전의 조직문화에서 일찍이 숙달되지 않았다. 에이플랜이 첫 경험이다. 

  
   “ 바쁜 사람들 너무 불러내지마. ”


   구정길 전무가 농담반 진담반 말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소집' 하는 회의에 불만이었다. 나는 이해했다. 그러나 대안이 없었다. 대안 없는 불평보다는 적응을 하는 편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나도 " 바쁘기는 에이플랜 우리들입니다 " 하는 말대답이 입 가를 맴돌았다. 

 

 


   에이플랜 팀으로서는 경영회의의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기를 바랐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요청했는데 변죽 만 울릴 때는 답답했다. 

 

   지나친 과잉 반응도 힘들게 하지만 무관심은 더 곤혹스러웠다. 묵시적인 반대나 때로는 저항으로 보였다.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인 이희종 CU장도 느끼는 가장 큰 불만이었다. 

 


   ‘ 오늘, 우리 끝장을 보자. ‘

 

   ' 김 이사, 사람 수대로 화촌에 도시락 주문해! '

 


   화촌은 트윈타워 서관 지하에 있는 일식집이다. 어느 날, 약속된 외부 오찬 일정을 변경해가며 이희종 CU장은 이렇게 다그쳤다. 에이플랜 팀이 느끼는 고역을 CU장이 대변했다.

 

 
   그럴수록 에이플랜 멤버들은 앞 만 내다보며 달렸다.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全方位적인 능력과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했다. ‘에이플랜 팀’이라는 한마디가 신앙이 되고 버팀목이 되었다. 

 


   “ 이사님이 교주입니다. ”


   어느 날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 목사는 누가 되나?  박진홍인가. ”


   내가 말했다.

 

 

   ‘에이플랜 교’가 탄생했다. 서글픈 농담이었으나 절실하게 사무쳤다. 산전이 언젠가는 기억해 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우리들에게 날아올 파랑새였다.

   

   

   오늘 보고회 뒤풀이에서 에이플랜 팀 모두는 부딪치는 소주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컨설턴트가 눈물을 흘렸다.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는 컨설턴트의 속성에 비추어 전혀 의외였다.

 

   후지모토의 돌출 행동은 파장이 예고되었다. (47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