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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의 팡세

귀촌일기- 갈대숲이 사라졌다








16년 전, 2003년

 내가 도내리에 집터를 장만해 집을 짓고 있을 때

이 마을에서 28년 이장을 하셨던 분(버갯속 영감)이

'이 골짜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게 되었냐?'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몇번 되물었다.


충청도 오지 중에 오지, 도내리 중에도 안도내,

육지의 끝이었다.


그 바로 이태 전인

2001년에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가 아니면

외지사람이 찾아올 꿈도 못꾸었던 곳이다.




 벽돌을 쌓는 일만 집을 짓는 게 아니었다. 이웃 간의 유대는 터전이자 기초였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며칠 전에는 서너 집이 추렴을 해서 만리포 조금 못 미쳐 모항(茅項)에 장어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이장 모조(모곡)도 냈다. 을메기(새참)에 빠뜨리지 않고 불러주었다. 꿩 탕, 토끼 탕, 잉어찜도 도내에 와서 처음 먹어보았다. 배꽃이 필 무렵에 알이 꽉 밴다는 설기가 반가웠다. 가재 사촌같은데 쌉싸름한 맛이 내 입에 맞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경로당에 인사를 갔다. 가져가는 물품이라야 떡 방앗간에 미리 맞춰둔 시루떡과 맥주, 소주, 과일들이다. 이삼일 전에 회장인 버갯속 영감에게 날자와 시간을 알려두면 제시간에 빠짐없이 모였다.

  누군가가 기증을 한 노래반주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아무도 작동시킬 줄을 몰라 내내 놀렸다. 이날이 반주기가 오랜만에 빛을 보는 날이다. 한잔 두잔 술이 쌓이자 마이크 쟁탈전이 벌어졌다. 깔아주는 멍석만 있다면 신명은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였다. 집사람은 아파트 단지 내 주간 보호실과 치매센터에 봉사활동을 한 경험으로 분위기를 곧 잘 휘어잡았다.



나는

<버갯속영감 교유기>에서 이렇게 썼다.


뒤로 바다가 보이고

앞으로 수로가 길게 뻗은 뜰이

마음에 들었다.


해 뜨면 밀짚모자 차림에 밭으로 나가고

달 뜨면 풀벌레 소리를 벗삼아

세상이 조용해서 좋았다.






그것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흘러 이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도처에 집을 짓는다.


서로 인사도 없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시대의 마지막

도내리 주민이 되었다.






정다웠던 물웅덩이 소롯길도

레미콘 포장이 되었다.


사뿐했던 오솔길 촉감이

발끝에서 사라졌다.







최근 며칠 눈 깜빡할 사이에 

수문 근처의 갈대밭이 준설이라는

기계음 앞에 밀려났다.


홀로 듣던 갈대숲 숨소리도

머나먼 옛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