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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의 팡세

귀촌일기- 2주 만에 외출에서 돌아오다(4) '월남의 달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 대화라고 말했다. 누천 년의 국사가 역사라면 수십 년의 개인의 과거도 역사다. '베트남'보다 '월남'이 나에겐 더 친근하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용어보다 월남 전쟁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한 세대다.

 

이번 월남 여행은 두 번째다. 23년 전 1996년 무렵, 회사 일로  하노이를 두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김우중 회장 부인이 경영하던 하노이 대우호텔이 최고급 호텔이었다. 호텔 로비에는 이 호텔에 묵어간 유명인사들의 사진이 빼꼭히 걸려 있었다. 내가 본 월남의 첫 인상은 우리나라 정서와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71년, 첫 직장이 국회의원 비서였다. 서울 중구 인현동 삼풍상가에 국회의원 회관이 있었고 태평로에 국회의사당이 있던 시절이다. 내가 보좌하는 국회의원을 대리하여 참석한 첫 공식 행사가 그 해 여름 어느날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의 합동안장식이였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골이 돌아오면 현충관에서 합동 봉환의식을 하고 유족들에게 인계한 다음 안장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월남전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가끔 지역구 출신의 자녀들이 전사해 돌아왔다. 내 나이 또래였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도 있었다.





이번 여행지는 베트남 중부, 다낭,후에,호이안이었다. 다낭하면 청룡부대가 떠오른다. 월남 파병의 첫 부대가 귀신 잡는 해병 청룡부대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는... 귀신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려 삼군의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엊그제처럼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다낭에서 후에까지 110 키로를 세 시간을 달려 기차로 갔다. 오른편으로 남지나 바다, 왼편으로 산악지대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밀림이었다. 정글이었다. 베트콩 루트, 베트콩이 생각났다.








월남전에서 우리의 장병들이 1965년부터 8년동안 피를 흘린 대가로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우리 부부가 지금 월남땅에서 한가로이 자유여행을 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온갖 정치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병의 결단 박정희 대통령, 당시 김성은 국방장관, 참 군인 채명신 파월 사령관이 생각났다. 한 푼의 달러라도 벌기위해 월남땅에서 쓰리쿼터 몰았던 조중훈 한진 사장도 생각했다. 파월 장병의 환송, 환영식에서 태극기 물결, 보무당당한 가두행진에서 걸어주는 꽃다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막내놈이 맹호부대 출신이라는 것도 나에겐 내심 자랑스럽다.




 

남남 쪽 먼먼 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님 얼굴... 그 누가 불어주는 하모니카냐... 아리랑 멜로디가 향수에 젖네 가슴에 젖네...


이번 여행기간 내내 밤이면 달이 밝았다. 월남전 당시 유행했던 노래. '월남의 달밤'이었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 대화라면 여행은 대화를 이어주는 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