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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귀촌일기- 김종필 'JP칼럼'과 충청도

 

 

 

 

 

 

기억이 세월에 바래면 추억이 되는 가.

 

귀촌이랍시고 이곳 태안에 내려와 충청도에서 살 줄은 몰랐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다 보면

운산이라는 곳을 스쳐 지나가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JP의 '서산농장'을 떠올리고 서산농장하면 'JP'가 또 생각난다.

 

사진 한 장.

 

어딘 가에 흑백사진 한 장이 있을 거라는

생생한 기억 때문이었다.

 

JP는 김종필의 영문 이니셜이다.

 

소위 3김으로 통하는 'YS', 'DJ'도 'JP'에 비하면 훨씬 뒤다.

60년대부터 김종필을 'JP'라 부를 때 김영삼, 김대중은 일본말 잔재가 남아

'에이상', '다이쭈'라 불리었다.

 

'JP'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부침과 어울려

5.16 혁명이라는 군사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의 가슴은 퍽 낭만적이면서 그의 머리는 이지적이었기에

구 정치인과 차별화된 애칭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오늘따라 마음 먹고 40여 년 전의 앨범을 꺼내 뒤적인 끝에

신문 스크랩과 함께 그 때 그 사진을 찾았다.

 

1970년 4월 30일.

타워호텔.

 

서울 시내 17개 대학 신문사 학생 대표를 초청한 좌담회였다.

 

 

아나톨 프랑스는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종말기에 두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숨을 거둘 때까지 평생을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발랄하게 살기를 갈구한 말일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내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세마디 뿐이다.

"노력하라.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가슴을 펴고 내일을 향하여 배우며 돌진하라....

 

 

좌담회 내용은 일요신문에서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격려'라는 제목의

<JP칼럼>에 게재되었으며

이듬해

JP 저서 <JP칼럼>으로 출간되었다.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안타까운 일인지 다행스런 일인지 JP가 인용한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청춘을 인생의 마지막에 배치할 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JP는 당시 43세였다.

 

 

 

 

 

글의 흐름상 경칭은 생략하였으며, 이 사진은 좌담회 며칠 후

일요신문사에사 참석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