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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2016년의 다솔사(2) 님은 갔습니다

 

 

 

 

 

47년 만의 다솔사.


대양루를 비켜 돌아드니 박우물을 만났다.

한 박 가득 떠서 마셨다.


1969年 1月24日(12.7)  金  乍曇乍晴

점심 후 수좌 상현군의 안내로 조실 최범술 스님을 배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님은 서책을 읽고 계신 듯, 방안의 사방에 놓여진 장서용 캐비넷과 옆에 육중하게 걸려있는 박달나무 목탁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불상이 든 액자, 넓직한 책상, 문구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내 육체의 무게 중심이 나를 떠나 장판지 저 바닥밑으로 축 늘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날의 내 일기다.


효당 최범술 스님을 처음 만난 날이다.

竹爐止室.


40여 년 동안 방지를 갈지않아 떨어진 곳만 더덕더덕 장판지를 오려붙인 그 방바닥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앉았던 자리이고, 김범부, 김법린 선생이 앉았던 자리이며

허백련 선생과 담소했던 자리였다.

 

'낡았다고 함부로 바꾸면 우리에게 어찌 문화가 남아있으며

민족혼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귀에 쟁쟁한 효당의 말씀을 엊그제처럼 되새기며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양루 강원에 앉은뱅이 불자가 만들었다는 대나무 자리는 흔적도 없고,

아름다운 난간과 문짝은 떨어져 나가 휑한 차 전시관으로 변모했다.


죽로지실은 대나무 발로 가리워져 쪽마루가 보이지않은 건

그렇다 치고,

죽로지실 좌우 대칭으로 안성마춤이던 요사채, 노전 자리엔 새 건물이,

더더욱 놀란 건 대웅전이 아니라 적멸보궁으로 바뀐 법당 편액이었다.


불상 대신 와불 너머로 창틀을 만들어 법당 뒤 사리탑을 보게 한 것이

40여 년 만에 찾아온 중생에게는 뜬금없고 생경했다.


문화해설사인 듯 열심히 설명하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며 

만해, 김동리 선생이 머무른 安心寮 마루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천년 고찰이 이럴 수가.



 


그날 죽로지실에 함께 했던 효당 스님은 79년에 입적하시고,

나와 동갑이던 그 날의 수좌 김상현 군도

원효사상 연구의 대가로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3년 전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