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네방네

귀촌일기- 팔봉산의 오청취당 시비

 

 

 

 

 

 

 

 

 

 

 

 

팔봉산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하자 마자 오른편에 시비가 세워졌다.

 

吳淸翠堂 詩碑.

 

앞면에는 '自嘆'(스스로 탄식하여)이라는 제목의 시 한 수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오청취당의 삶과 문학'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였다. 

 

 

 

 

 

 

 

 

 

오청취당(1704-1732)은 300여 년 전,

현재 평택 포승에서 해주 오씨 가문에서 태어나

22살에 충청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의 경주 김씨 문중의 김한량과 혼인하여

29살에 이생을 마감했다.

 

7년의 결혼생활동안 두 번 자식을 잃었고

가난과 병마,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살다간

18세기 초 조선시대의 여인이다.

 

짧은 삶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단상을

182수의 한시로 담아냈다.

 

 

 

 

 

 

 

'과거 시험을 몇 번 보았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한 남편은

청취당의 고독한 정신세계를 무시했을 것이며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으리라.'

 

'나는 시시한 여인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이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않았던 여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은 맑은 대나무 잎처럼 빛을 낸다고

청취당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불렀다.'

 

 

우리 규방문학이 대체 그러하기도 하거니와, 청취당은

쇠잔한 양반 가문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우리나라 고전 문학사에 전혀 언급이 없었다.

 

최근 <오청취당집>의 발굴은 충청도 이 고장에서

걸출한 여류시인 한 분이 다시 탄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

-

-

 

빈한했던 경주 김문에도 해뜰날이 있었다.

 

15세의 나이에 1759년 66세의 영조의 계비로 간택된 정순왕후가 

여기 한다리 김씨 문중으로 생가가 있다.

 

며칠 전, 유계리의 계암 김기현 님이 보내주신 '청취당집' <꿈>과

<고택에 돌아와서> 수필집의 일부을 인용하여

윗글을 구성하였다.

 

몇 년 전 유계리 마을 입구에도 청취당 시비를 건립했는데 계암 님은

시비 건립에 위원장을 맡았으며

'김기현 고택'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