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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김상무 아리랑(16화) '사장님과 직거래 하겠습니다'

 

 

16.

 

 

나는 이희종 CU장을 찾아갔다.  어제 오후에 회의석상에서 구두로 공개 발령을 받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에이플랜 팀의 팀장으로서 첫 대면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CU장은 집무용 회전의자에 앉아서 시거를 손질하고 있었다. 가끔 보아온 나로서 이런 여유가 보기에 좋았다.

늘 그랬던 습관대로 턱을 쑥 내밀며 앉으라는 시늉을 보냈다. 나는 책상을 두고 마주앉았다. CU장은 자세를 앞으로 고쳐앉으며 나한테서 무슨 말인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제 회의가 끝나자마자 트윈빌딩 서관에는 곧바로 소문이 퍼졌다. 창원,청주,천안 공장장들의 전화가 다투어 걸려오기 시작했다. 창원공장에 있는 노조위원장도 전화가 걸려왔다. 축하 일색이었다. 한편으로 이제 고생 좀 하겠소하는 어감이 저변에 깔려있기도 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세 회사의 동시 통합 작업은 매킨지도 처음으로 해보는 작업이라고 했다. 이 말에 나는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더 이상 옆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가야할 길은 가야했다.

 

무언가 시작할 때에는 애당초 가닥을 잘 잡아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중압감이 새삼 나를 눌렀다.  

이희종 CU장에게 두어가지 건의사항을 준비했다. 공식 문서로 올릴 수도 없었다.

건의사항은 팀 운영의 근간이자 탑의 결심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에  나로선 CU장에게 다짐을 하고 싶었.

 

“저,  어제 하루, 좀 얼떨떨했습니다. ”

“ ............... 그러겠지."

눈을 반쯤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의 표시였다 

 

CU장은 시거에 불을 붙였다. 가스라이터를 누르며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서너 번 볼을 오목거리며 힘껏 빨았다. 시거의 연기가 푸른 빛을 내며 피어올랐다. 특유의 시거 향이 두 사람 사이에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장님, 에이플랜을 저에게 맡기셨는데... 해 보겠습니다. ”

그래. 쉬운 일은 아닐 거야. ”

그런데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

“ ................... ”

CU장은 시거를 입에 문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소 누그러지려던 분위기가 잠깐 긴장으로 흘렀다.

, 사장님과 직거래로 하겠습니다. “

“ .................. ”

 

박충헌 전무에서 허창수 부사장으로 이어지는 결재 라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중간에 결재 단계가 없어야 합니다.... ”

당연해. 나하고 직거래야. 김 이사 말이 맞어.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CU장은 단언했다.

CU장은 시거 한 모금을 힘차게 빨아들였다. CU장도 그동안 혼자 숙고해온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에서 한 고비를 넘긴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CU장의 표정을 읽으며 다음 사항을 확인해갔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안해본 일 입니다. ”

맞아. 나도 그동안 많이 생각했어. 쉬운 일이 아니야. ”

내가 다음 말을 이어가려는데 CU장은 맞장구를 쳤다.

 

무엇보다도 일정입니다. 일정에 맞추려면 타임리하게 의사결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한 단계가 늦어지면 연달아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시로 찾아와서 직접 의사결정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의사결정이 중요해. 우리 같이 해봤지?... ”

“ ................ ”

 

나는 CU장을 쳐다보았다

 

“..... 2년 전에 ‘ OVA ’ 할 때 말이야. 그 때처럼 그렇게 차고 나가 주면 돼. ”

그 때의 기억을 CU장이 생생하게 캐냈다.

 

우리 같이 해봤지?

 

어쩌면 혼잣말처럼 들려온 그 한마디는 갑자기 전율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때처럼 그렇게 차고 나가 주면 돼. ’

 

이번 A 플랜 프로젝트의 팀장으로 미리 점찍은 까닭을 그 한마디로 느꼈다. 그건 나에게 거는 기대이자 강력한 주문이었다

   

에이플랜 팀은 사장님의 관심을 먹고살겠습니다. “

, 알았어. 김 이사 말 알아. ”

 

 CU장은 손에 쥐고있던 시거를 한모금 음미했다.

   

 

이희종 CU장은 나에 대한 이미지를 글로서 나타낸 바가 있었다.

작년 6월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임원 ST( Sensitivity Training )를 할 때였. 45일동안 합숙하면서 진행한 임원ST 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무리 순서에서 유동수 진행자는 임원끼리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쓰게 했다. 평소 회사의 일상생활에서 느낀 바를 충고나 조언하는 내용으로 18명의 참가자들 서로를 대상으로 일일이 썼다.

 

더 보탤 것이 없소. 그대로 해주면 되오. ’

 

이희종 CU장은 나에게 주는 메시지 카드에 이렇게 적었다

 

 

1992년 6월,임원 감수성 훈련(ST)을 마치는 날이다.

이희종 사장, 허창수 부사장,안재화,최호현,이중칠,구정길 전무들의 얼굴이 보인다.

 

 

 

 

사장실을 나오며 이희종 CU장이 말한 2년전의 그 순간들이 다시 떠올랐다. 인사 업무담당으로 신참 임원이었던 나는 < 산전CU OVA 추진 프로젝트 > 사무국장도 맡았었다.

 

프로젝트 킥업하는 날이었다. 나는 현장에 가서 미리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무대 정면이 어쩐지 허전했다. 가운데 흔히 있을 법한 프로젝트 추진을 알리는 배너가 없었다. 기존 통념을 깨는 생략이었다. 내 나름의 큰 의미이자 작은 실천이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CU의 임원,공장장, 간접부문의 전 관리자, 매킨지의 컨설턴트, 그룹회장실의 관련임직원, 심지어 다른 CU의 견학 임직원들까지 찾아와 트윈빌딩의 동관 31층 강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찼다.

 

킥업 시간에 임박할 즈음 나는 이희종 CU장실로 갔다. CU장은 막 나서려는 참이었다. 내가 미리 써드린 격려사 원고를 손에 들고 있었다.

 

 

 

 

CU장이 정시에 도착하자 행사는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추진개요는 김용철 팀 리더가 설명했다. 이어서 각 부문에서 선발된 추진 멤버 24명에게 CU장의 임명장이 수여되었다.

 

여전히 행사장은 긴장감이 흘렀다. 과거에 사무간소화나 파일 관리의 과학화 정도의 관리부문 정리정돈 범주는 주기적으로 가끔 있었다. 간접부문의 효율 문제는 사업계획을 세울 때면 으레껀 한번쯤 지나가는 말이었다. 간접부문 하면 효율과 거리가 먼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사 간접부문을 대상으로 간접업무 전반의 효율화를 전제로 하는 프로젝트는 처음이었다. 컨설팅의 결과에 따라 간접부문의 조직과 상당수의 신분상 변화는 불가피했다. 지금까지 안해본 일을 한다는 일반적인 관심이나 호기심 수준에서 사내 정서는 크게 넘어섰다.

 

간접부문 인원을 대대적으로 칼질을 한다. ’

불안감은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룹회장이 주도하는 그룹차원의 혁신활동인데다 외부 컨설턴트로 매킨지가 가세한다는데서 긴장감은 더 했다. 라인 부서까지 덩달아 사내 분위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이희종 CU장의 격려사 차례였다. 단상에 올라간 CU장은 서두 없이 본론부터 말했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간접부문에서 하는 일 중에 어떻게 하면 꼭 해야 할 일만 골라하는가? 그런데 바로 이 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습니다. ”

 

장내는 긴장했다. 모두들 세 가지가 무엇인지 귀를 세웠다.

 

조금 전 내가 여기에 오려하는데 이 프로젝트의 사무국장인 김형철 이사가 내방으로 나를 데릴러 왔습니다. 내가 시간을 모릅니까, 길을 모릅니까, 걷지를 못합니까...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맙시다. ”

 

나는 맨 앞줄에 앉아있었다. 내 뒤통수로 모인 시선이 갑자기 뜨거웠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사무국에서 격려사를 써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일도 이젠 하지 맙시다.... ”

 

“ 그리고 조금 전에 사령장 줄 때 여러분들 보았지요. 세 사람의 사원이 단상에 올라와서 교탁을 옮기고 정리를 했습니다. 세 사람이 왜 필요합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맙시다... "

 

"오늘 이 자리에서 다짐을 합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가려내서 잘라냅시다. 나는 오늘 이 말만 하겠습니다.”

 

격려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희종 CU장이 쪽집게처럼 집어낸 세 가지 사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의식이 없이 해내려온 당당한 관행이었다. 맨 앞줄에 앉아있는 세분의 사장님도 회사에서 늘상 보아온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 일들이었다

나를 표적으로 한 CU장의 일격은 아팠다. 그러나 이보다 좋은 격려사는 없었다. 그런 관행을 없애자는 게 OVA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징적인 사건'은 OVA를 추진해가는 과정에 두고두고 위력을 발휘했다. 나의 행동도 변화를 가져왔다.

 

혁신활동이란 으레 그런 것이지만 전사적인 충격과 긴장으로 시작된 OVA였다.

간접경비의 절감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간접부문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 과정은 거대한 학습이었고 본사와 공장은 전사적인 학습장이었다.

 

나로선 산전CU의 4개 회사와 7개 공장을 누빈 일년 반이었다. CU장도 내가 제시하는 프로젝트 추진 카렌다에 철처하게 따라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사든 공장이든 OVA 추진에 관한 일정이 최우선이었다. 자질구레한 결정사항 하나도  OVA라면 미루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않았다총론에 맞으면 각론은 일임하는 이희종 CU장의 진면목을 보았다

 

밑에서부터 올라와야 돼. 지시 일변도로는 성공할 수 없어. ”

일에 대한 확신과 OVA추진 실무팀에 대한 신뢰였다. 성과는 나에게 보람을 안겨주었고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기(氣)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 기(氣)를 가감없이 팀원에게 전달했다.

 

 

우린 다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돼.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

CU장은 충격요법에 대한 최고경영자로서 자성을 은연중에 나타냈다. 조직에서 군살의 제거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직의 아픔이었다.

 

간접부서의 유휴인원을 전사적으로 적재적소에 재배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간접부서의 인원은 줄었지만 능률은 올라갔다. 남아있는 인원도 직접부문으로 전배된 인원도 불만이 없었다

OVA에서 공통과제인 책임과 권한의 명확화와 의식과 행동에서 워킹스타일의 변화를 CU장은 솔선해서 행동으로 옮겼다. 혁신활동의 성패는 최고경영자가 행동에 달려있었다.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혁신활동일수록 그렇다.

 

“ 40%의 목표에서 27.5% 달성이라는 수치보다 의식과 행동에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TFT 활동의 우수 사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해보겠다고 위원회나 별도 팀을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OVA TFT가 인식을 바꿨습니다. 그게 뿌듯합니다. ”

나는 이희종 CU장에게 최종 성과보고를 마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작은 불씨가 커지는 거야. 우리는 불씨를 지폈어. ”

CU장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이 해봤지. ‘ OVA ’ 말이야. 그 때처럼 그렇게 차고나가 주면 돼. ” 

이희종 CU장이 오늘 나에게 한 말엔 그동안의 전말이 그대로 함축되어있었다.

 

 

 

 

 

 

1993년3월, 이희종 CU장의 회갑을 축하하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