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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김영삼의 박정희론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으란 말이 있다.

 

'영샘이, 영샘이' 하는 말을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들었다. '영샘이'가 할아버지한테 보낸 편지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재비 못된 게 항렬은 높다고, 따지고 보면 내가 조금 높은 한 집안이다.

 

59년 내가 열두세살 되던 때부터 5,6년동안 여름방학이면 나는 진주에서 거제도에 갔다. 진주에서 삼천포로 가서 천신호 배를 타고 성포에 도착하면 터덜거리는 버스가 포로수용소가 있던 고현을 지나 옥포까지 간신히 데려다 주었다. 하루 종일 걸렸다.

중간 기착지인 충무 뱃머리에서 김밥을 먹었는데 어린기억에 어떻게나 맛이 있던지 나중에 보니 그게 충무김밥이었다. 가끔 마산에서 동광호로, 부산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영복호로 가면 뱃시간 만 너댓시간이 걸리는 옥포행이었다.

 

'영샘이 집'이 있는 장목면 덕포리에 해수욕을 겸해 자주 갔었다. 옥포에 없는 모래사장이 작으나마 덕포에는 있었다. 옥포에서 덕포까지 걸어서 먼 거리가 아니었다. 

'영샘이' 부친이신 홍조씨(당시 부친 성함은 기억하지 못했음)도 옥포로 나오는 길이면 친구이자 한 집안인 나의 할아버지를 가끔 만났다.  나를 인사 시켜 두어번 뵌 그 때 기억이 남아있다.

 

 

 

 

 

 

 

 

 

옥포는 그 뒤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상전벽해가 되었다. 장승포 뒤 고개 넘어 두모에서 옥포로 오는 뱃길 도선이 있었지만 늦어 찻길마저 끊기면 아주를 지나 밤길을 걸어서 옥포로 오기도 했다. 아주에는 동쪽으로 마치 일본을 향해 거북이 형상으로 틔어나온 곳이 있어 이순신 장군 승전기념비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옥포대첩이 저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멀리 옥녀봉이 있고 집 뒤로 국사봉이 빤히 올려다보였다.

'영샘이'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 투사로 각인된 그의 정치역정으로 보아 우리의 정치사에 빼놓을 없는 인물 중에 인물이다. 인생의 행로에 어느 누군들 공과가 없으랴만 '영샘이'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는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같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놈'이라니... 개인적인 역사의식이야 그렇다치고 단어의 선택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김영삼 님의 격이 아니다.

 

나는 서가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40대 기수론'도 민족을 위한 위대한 선택이었듯이 '국가와 혁명과 나'도 겨레를 위한 결단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장점도 보이는 법. 언젠가는 대통령끼리 敬을 표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