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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다솔사 일기(7) 원효와 효당

 

 

 

 

 

오늘 새삼 꺼내본다. 그 때 주신 글을 007가방에 접어둔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 송구스럽다. '茶道無門'은 그렇다치고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 중의 글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의 의미를 아직 나는 모른다. 당시 효당의 말씀을 듣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로부터 2년 뒤 1979년 효당은 76세로 입적했다. 법랍 63년. 서포 바닷가 밤섬에서 4남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범술은 13세에 다솔사에 출가한 다음  해인사에서 임환경 스님으로부터 수계했고 원효불교 복원에 서원을 해 스스로 효당이라 법호를 지었다. 47년 해인사 주지가 된 효당은 6.25의 와중에 자칫 폭격과 소실 위기에서 팔만대장경을 끝내 지켰다. 일찌기 박열 의사의 일본천황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만해 한용운과 만당을 결성하고 이후 다솔사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효당이 만해의 회갑을 다솔사에서 베푼 사실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효당은 그토록 왜 원효인가. 원효대사는 역사상 불교를 대중화한 민중불교의 시조다. 다수의 민중으로 사회적인 통합을 이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건 당연한 귀결이다. 속성이 설(薛)인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효당이 원효불교라는 종단을 만들고 다솔사를 그 도량으로 생각하며 아낀 이유의 언저리를 조금 알 것 같다. 

사후 뒤늦게 효당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나 그 과정도 순탄치않았다. 효당의 말년도 말년이려니와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안타깝다. - 죽은 사람이 사람이 산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가 없을 가. 다솔사에 만해가 심은 향나무와 안심료 앞 금잔디 밭이 오로지 진실을 말해줄 뿐이다.

 

평창동에서 북한산을 오르면 대성문으로 넘어가는 능선 초입에 일선사 절이 있다. 어느날 등산 길에 절 아래 샘터에 물먹으러 갔다가 절 입구 게시판에 붙은 법회 공지문이 눈에 띄었다.

 

'원효사상과 한국불교. 초청 강사-김상현(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 다음날 물어물어 휴대전화에서 들려오는 김상현 교수의 목소리를 엊그제같이 사십년 만에 들었다. 3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날카롭게 숙제 하나가 남았다.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상현 수좌에게 물어봐야겠다.  다솔사를 떠난 효당이 속세의 풍진 속에 이 글을 나에게 주신 뜻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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