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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다솔사 일기(6) 汝矣無門

 

1969年 1月30日(12.13) 木  曇後雪

열흘의 산사 생활을 끝내고 하산했다. 눈덮힌 다솔사 송림 사이로 이불보퉁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왔다. '작품이 없다고 예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김시습이, 서양에서는 조각가 자코메티가 보여주었다.  예술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성을 위해 다가가는 것이다.

 

1970年 1月31日(12.24) 土  晴

하산했다. 스무날도 못됐는데 내려가느냐고 혜담 스님이 말했다. 참는 것도 수양이라 인내가 없으면 성사를 할 수 없고 타성이 되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상현군을 만나러 갔으나 없어 섭섭했다. 백암과 윤달군이 절 아래 추동까지 바래다 주었다. 다솔사에 오는 것도 이젠 어려울 것 같다.

 

69년,70년 각각 열흘, 스무날 동안의 다솔사 생활을 마치고 내려오는 날 나의 일기다.

 

 

(며칠 전 가보았다. 눈에 띌듯말듯 서울 웃대마을 초입의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제헌회관과  제헌동지회. 문은 이중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세월이 흘러 1977년 여름 어느날이었다. 나는 효당 최범술스님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났다. 다솔사 조실로 죽로지실에서 뵌지 7년 만이다. 세상만사 우연은 없다지만 이건 우연이었다.  69년과 70년 이태 정초를 鳳鳴山下多率寺에 머물렀으나 그동안 나는 다솔사를 까마득히 잊었다.  내가 봉일암에서 그렸던 수채화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 초년병 시절을 겨우 벗어나고 있었다.

효당은 수척하셨다. 기달죽한 말상에 안광은 그대로였으나 어깨의 균형이 무너졌고 머리에 얹힌 서릿발은 더 거세졌다. 종로구 통의동에 제헌의원들의 모임인 재헌동지회가 있는 제헌회관이 있는데 여기에 주로 출입을 하시는 것 같았다.

 

다솔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가. 그동안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졌다. 중들의 폭력사태인 소위 '다솔사 사건'이다. 불교 정화, 사찰 정화라는 명분에 휩쓸려 노 스님에게 마음 고생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다솔사를 원효불교의 종단 도량으로 생각하는 효당과 조계종단 사이에 밀고 밀리는 마찰이 있었다. 효당은 법난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맞섰으나 가벼운 중 떠나듯 결국 다솔사를 떠났다. 오십 여년 효당의 정신 세계가 그대로 배여있는 다솔사를 미련없이 내주고 불교계의 거목 효당은 속가로 내려왔다.

 

며칠 후 효당은 누런 대봉투 하나를 들고 오셨다. 봉투 안에서 하얀 서류를 천천히 꺼내 나에게 주셨다. 

 

'茶道無門'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효당 당신이 쓴 친필 두점이었다. 제헌동지회의 제헌회관에서 쓰신 것이다. 해인사 주지 때 칡뿌리를 묶은 붓으로 황톳물을 찍어 너럭바위에서 필법을 단련했다는 필체 그대로다.  운필에 군더더기가 없어 나무 막대기 흡사 뼉다귀를 연상시킨다. 추사도 흉내낼 수 없다며 칭송해 마지않던 필획이 아니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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