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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다솔사 일기(3) 청동화로

 

1970年 1月23日 (12.16) 金  晴

점심 후 절에 내려가 최범술 조실스님과 두 시간 가까이 마주앉아 얘기할 수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이렇다. 

-민주주의--- 하지만 천 몇 백년 전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 즉. 원효대사가 말한 '인민이 하고싶은대로 하게 모든 곤욕

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지상(至上)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욕이 없어야 하며 무(無)가 아니어야 한다.'

-원효,퇴계,율곡은 물론 우리 고대문화를 우리보다 일본 사람들이 연구를 많이 하고 오히려 그들의 연구 결과를 우리가 참조하는 형편이지.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쓸데없이 선전만 했지 더욱 빛내고 더 깊이 발전시키는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젊은 사람들의 활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불교계의 내분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상현 수좌가 끓여내놓는 차를 마셨다. 

나는 강당 중앙에 걸려있는 김정희가 쓴 '遊天戱海'라는 현판의 의미를 여쭤봤다. 무슨 뜻인 것 같으냐고 스님은 내게 반문했다. 나는 이성을 갈고 닦아 현실에 적응시킨다고 내 나름의 해석을 부쳐봤더니 그것도 가능하단다. 

스님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누런 편지 봉투를 집어들어 칼로 자르더니 뒷면에 또박또박 볼펜으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유천희해는 遊曆諸天戱豫法海의 약어라며 遊,天,戱,海 네 글자 옆에 동그랗게 방점을 찍었다. 

 

1970년 1월23일의 일기다. 스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 순간 뜻은 몰라도 의미는 와 닿았다. 사십 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유천희해'를 삶의 화두로 삼아 가까이 두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경지를 아직도 더듬고 있다.

 

                                                                

(황토물을 들인 캔버스천에 그린 먹물 그림. 거실에 걸려있다)                                                                                                                                                                    (효당의 볼펜 글씨) 

 

나는 가끔 본절로 내려가 효당을 뵈었다.  내가 질문을 하면 효당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나의 견해를 꼭 먼저 물어보았다. 내가 뭐라고 주섬주섬 말하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아니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 하면서 주제를 조용히 풀어나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상대방의 수준을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았다.

 

산사의 겨울은 춥다. 처마를 비껴 창호를 비추는 햇살이 하두 따사로워서 효당이 거처하는 죽로지실은 늘 훈훈하였다. 더욱이 저만치 놓여있는 화로가 눈길을 끌었고 화롯불에 불씨가 살아있어 언제든지 차를 끓일 수가 있었다. 대형 청동 화로와 쇠주전자, 다기가 정갈하여 놓여있어 일상사가 차로 연결된 효당의 다도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뵈러 갈 때마다 효당은 팽주로서 우리들에게 조용히 차를 권했고 다 마시면 다시 따라 잔을 채워주었다. 한지 장판으로 도배한 십여 평의 죽로지실은 피워둔 향내와 차향이 어우러져 늘 은은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다 효당이 화로 옆에 있는 주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언젠가 외출했다 돌아왔더니 저 녀석이 화로와 주전자를 박박 닦아놨더군. 시키지도 않았는데..."

"............"

"푸르스럼하게 녹이 그대로 씨러있는기 좋은 긴데... 안그런가. 제 딴엔 깨끗하게 씻는다구 짚으루 잿물에 모래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버렸어. 칭찬받을 줄 알구. 허허."

효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

이미 오래 전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효당이 수좌에게 어떻게 하셨을 가 나는 상상만 했다. 마침 수좌는 자리에 없었다.

 

효당 최범술은 우리나라 차문화를 정립한 다도의 최고봉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승을 위해 세심하게 홀로 실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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