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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다솔사 일기(2) 청춘의 열병

 

다솔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로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스님이 조실이었다. 효당은 이미 40대에 해인사 주지였으며, 진주에 해인중고등학교와 나중에 경남대학의 전신인 해인대학을 설립했고, 제헌의원을 지냈다. 불교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거목이었다.

봉명산 아래에 위치한 다솔사의 법당 뒷쪽 양지바른 언덕배기는 온통 차밭이었는데 효당이 손수 가꾸었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첫 재배지가 지리산 자락이므로 다솔사도 그 중에 한 곳이다. 화개,구례 등 섬진강을 낀 지리산 주변에는 유명한 차밭이 많다. 효당은 방치되다시피 오래된 차전을 일구어 반야차(般若茶) 또는 반야로(般若露)라 불리는 다솔사 고유의 차를 만들었다.

 

 

상현(相鉉)이라는 효당 큰스님을 시봉하는 젊은 수좌가 있었다. 체구가 왜소해 더 어려보였다. 스님을 모신지 그리 오래지 않아선지 머리는 깎지않아 행자의 모습이었다.  몸이 가벼워 스님의 이런저런 지시사항을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스님이 거처하는 죽로지실에서 붓글을 쓰실 때는 묵묵히 먹을 갈았고 차를 준비할 때면 불씨와 물을 가져오는 등 효당 스님 옆에 앉아서 차수발을 들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효당의 배려로 진주에 있는 해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방학 때나 시간이 나는대로 다솔사에 들어와 효당 곁을 지켰다.

 

 

1970년 1월 16일(12. 9) 金  晴

아침 공양한 뒤 현국,상윤,월명 세 사람은 진주에 다니러간다고 내려갔다. 주지 영감과 바둑을 돌았다. ... 오후 점심 공양 후 아랫 절에 상현 씨를 찾아가 승방의 대화를 나누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효당 조실을 모시고 있으려 했는데 다솔사를 나가야 되겠다는 등 서로 거리낌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1970년 1월 17일(12.10) 土  晴

보살의 예불 목탁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뜨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면도구를 챙겨 후랫쉬를 들고 옹달샘으로 내려갔다. 겨울에는 별이 더 많이 보인다. 

점심 후 오늘도 상현 수좌를 만나러 아랫절로 갔다.  조실 스님이 부재중이라 마침 조실 방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처마의 기와 굴곡이 창호지에 그림자 되어 비쳐있는 모습에서 신비감마저 느꼈다.  더욱이 고풍창연한 화로와 그 위에 얹힌 주전자에서 끓여낸 차를 마시게 되니 이거야말로 신선이 된 느낌이다. ...가지고 간 카메라로 경내를 돌며 상현군과 사진 몇장을 찍었다.

 

 

상현 수좌나 나나 꼭 일년 만에 또 만났으니 서로 반가웠다. 내가 있는 북암과 본절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년 상현 수좌를 처음 만났을 때 일기에 이렇게 썼다. -똑똑하고 겸허한 인상을 받았다. 인간이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삼고 있으면 말소리, 행동, 특히 눈망울이 저렇게 선량해 질 수 있을가.

효당은 열세 살 때인 1913년 다솔사로 출가한 후 해인사에서 환경(幻鏡 1887-1983)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했는데 세월이 흘러 1965년, 해인사 근처에 살고있던 환경 노스님은 이웃의 상현을 다솔사의 효당에게 보냈다. 나는 외대학보 편집장을 맡아 시국에 얽힌 학내 문제로 머리가 무거웠고 상현 수좌 또한 몸은 절에 있어도 청춘의 열병이 없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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