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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동아방송-허구연의 전보(3)

 

한 여름이 가시는 어느 날이었다. 앞에 앉아있던 허구연이 의자를 돌려앉았다. 머리를 긁적이는 표정이 왠지 어두웠다.

"과장님..."

"............"

"방송국에서 제더러... 야구 해설을 해달래는데요..."

"............"

전혀 의외여서 나는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내일입니더."

허구연은 큰 덩치의 상체를 꾸부렸다 고쳐앉았다. 며칠동안 그 나름대로 망서리고 고민을 했던 흔적이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당장 내일이라는 말에 연달아 한방 더 얻어맞았다.

"내일이라꼬? 어딘데?"

"동아방송입니더. 황금사자기 야구..."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고등학교 황금사자기 야구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내일..."

나는 중얼거리듯 입 안에서 다시 되뇌였다. 생각할수록 난감했다.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그룹 회장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임직원이 주요 대외 활동에 참가한다면 그룹 기획조정실의 별도 장표에 품의를 올려 회장의 결재를 받도록 되어있다. 더욱이 근무시간 중에 나가야하는 데다 대상이 방송국이다. 정황으로 보아 내일까지도 불가능하거니와 회장의 재가도 불투명했다.

"약속을 했나?"

"해줄 거로 방송국에서 알고 있습니다."

"거,야단이네."

야구선수로서 허구연은 황금사자기와 인연이 많았다. 경남고 시절엔 내리 4번타자였고 67년 경남고와 경북고가 명승부를 펼치며 우승을 한 주역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동아방송의 해설요청을 한마디로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자구. 내일 일단 나가. 지금 더이상 어쩌고저쩌고 하면 일 만 꼬이고... 우짜노. 말이 나면 그건 그 때 해결하자꼬."

 

다음 날 허구연은 동대문 야구장으로 갔다. 나는 미리 준비한 라디오에서 허구연의 목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 순간 그의 야구인생에 새 지평이 열릴 줄은 장본인이나 나나 아무도 몰랐다.

 

1980년, 바로 그해 연말에 언론통폐합이 있었다. 동아방송이 사라짐으로서 허구연의 동아방송의 야구 중계 해설 기간은 짧게 끝났다. (계속)

 

                                                  (1980년 어느날 롯데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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