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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세월,아마도 빗물이겠지

 

 

 

 

어제 이권기(李權基)와 거의 이십 년 만에 통화를 했다. '아마도 빗물이겠지' 노래가 새삼  생각났기 때문이다.

 

맺지 못할 사랑이기에 말없이 헤어졌고/
돌아서는 두 발길에 이슬비는 내리네/
사나이가 그까짓것 사랑때문에 울기는 왜 울어/
두 눈에 맺혀있는 이 눈물은 아마도 빗물이겠지

 

데크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사십여 년 전 그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었다. 당시 남진, 나훈아의 쌍두마차에 식상한 젊은이들에게 머리 스타일부터 밤톨로 약간 반골기질에 개구장이 인상을 풍겼던 이상열이 불러 크게 유행했던 가요다. 그 노래를 이권기 이 친구는 습관적으로 입에 달았다.

그러나 나는 이 친구로부터 노래 전체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고 '아마도 빗물이겠지' 마지막 한 소절만 기분내키는대로 시도 때도 없이 읊었다. 피차 술을 좋아해서 한잔 하고 나올 때 어김없이 그 친구 입에서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아마도 빗물이겠지'는 어느 때보다 구성졌다. 어쩌다 아마도 빗물이겠지 노래가 들리면 이권기를 떠올리곤 했다.

 

이권기는 작가 이병주(李炳注)의 아들이다. 외대 일어과 크라스메이트가 된 건 순전히 인연이었다. 나는 67학번으로 한해 재수를 하고 입학했고 그 친구는 한해 뒤에 입학해 합류했다. 첫 인상은 키도 작고 곱슬머리에 어떻게나 부끄럼을 타는지 씨익 웃는 모습이 내가 보기엔 숫기가 없었다. 학과 이십 여명 중에 그의 고향이 하동이고 나는 진주였으므로 경상도 출신으론 마침 둘 뿐이라 곧 의기투합했다. 게다가 나는 학보사 일로 전공엔 소홀했고 그 친구도 일본어 전공에 흥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이 만나면 전공에 회의감을 표출하며 변방임을 자처했다.

 

피부가 뽀얗고 곱상한 얼굴에 술이 한잔 들어가면 빨리 빨개지면서 입가에는 절로 웃음기가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달변이었다. 작가이자 언론인의 아들답게 세상물정에 모르는 것이 없었고 독서량이 많아 고전과 현대소설을 줄줄 뀄다. 재미있는 화제가 있어 이거다 싶어 내가 학보에 실어주겠다며 원고지를 내밀어 원고 청탁을 한 적도 있다. 기다리다 못해 마감 독촉을 거듭했으나 원고지 두 장을 못 메우는 그의 글재주였다.

이병주 작가는 누가 뭐래도 눌변이다. 가끔 라디오 대담에 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갑갑하다 못해 답답할 정도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달랐다.

 

둘 다 집이 서대문구 녹번동이었다. 이웃이라 놀러가서 간혹 이병주 작가를 뵈었다. 처음 갔을 때 무엇보다 서가에 빼곡히 꽃혀 있는 책의 분량에 놀랐다. 서재의 한쪽 책상을 앞에두고 의자에 기대앉아 파르스럼한 파이프 담배 연기를 차분히 뿜어냈다. 굵고 짙은 뿔테 안경에 듬성듬성난 콧수염, 베토벤풍의 희끗한 헤어스타일이 어우러져 완벽하게 멋있었다. 

이날 나와 자식을 앞에 앉혀놓고 작가 아닌 권기의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상황에서 처음 본 아들 친구에게 그런 말씀을 했는지 사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리송한 여진이 남아있다. '악우(惡友)를 사귀라.' 공부 잘하는 친구도 아니고 얌전한 친구도 아니고 어쩌면 불량한 친구를 사겨라는 말에 묻어있는 속 뜻은.

당신이 쓴 작품집인 '마술사(魔術師)'를 나에게 주었다. 활자가 깨알같았으나 문체는 육중하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읽었다. 지금도 내 서재에는 그 때 받은 빨간 색갈로 장정된 '마술사'와 그로부터 몇년 뒤에 내 손에 들어온 비닐커버로 된 '예낭風物誌'가 나란히 꽂혀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귀절에 그 때 그으논 밑줄이 보인다. -사랑이란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청량리를 한참 지나 외대서 녹번동까지 종로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편도 두시간 거리였다. 하루 네시간을 길에서 보낸 셈이다. 그 친구는 나보다 그래도 덜 변방이었다. 나는 전공이 완전히 학보과였다. 학보의 발간에 기획,취재,원고작성,편집,조판,교정,인쇄,배포의 과정은 일일이 발로 뛰고 손을 거쳤으므로 나는 학보사 생활에 빠져있었다.

같은 학과 친구이지만 강의실에서 나란히 앉아 강의를 들은 기억은 피차 없을 것이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 ,그 친구도 마땅히 시간을 보낼 데가 없었으므로, 간혹 학보사로 나를 찾아왔다.  마주치는 눈빛에 약속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학교 앞이면 중국집에서 만두와 빼갈이었다. 필다방 모퉁이의 라면 아줌마 집도 빼놓을 수 없다. 건데기 없는 라면국물이 그래도 소주 마시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발동걸린 겨울 어느날 저녁이 기억난다.  버스에서 내린 둘은 보건원 앞에서 불광동까지 걸었다. 무슨 신바람에 누가 제안을 했는지 모르지만 보건원 앞에서 불광동까지 포장마차가 이십여 군데 있었는데 마차마다 소주 한잔에 안주 하나 씩만 먹고서 한집도 거르지않고 지나간 한때의 객기도 있었다.

안산 고개,홍제동 고개,녹번동 박석고개를 넘고 넘어 국립보건원 앞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이었다. 아침 출근시간이면 정류장에 마땅히 서야 할 화물짝 버스가 사정없이 지나가버리기 일쑤여서 두어번 놓치고 나면 한 정거장 위 불광동 종점까지 걸어가서 아무 불평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 타고 내려오기도 한 시절이 그 때다.

 

(1968년 11월 3일 그린 수채화.  녹번동 집 앞 언덕에서 응암동과 대조동,불광동 사이로

갈현동,증산동 쪽을 바라본 그림이다. 채마밭, 미류나무를 건너 논이 보인다. 그 사이에

둑이 있어 독밧골에서 내려온 냇물이 연신내를 따라 불광천으로 흐르며 때론 홍수가 나

범람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43년 전.)

 

대학 문을 나서자 이 친구와 서로 연락이 없어졌다. 대신에 내가 몸 담은 직장의 사무적인 연고로 1.20동지회 모임에서 이병주 선생을 만났다. 1.20동지회는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징집을 당해 남방이나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간신히 살아돌아온 당시 대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이병주 선생은 이 모임의 회보를 만드는 등 문화부장을 맡아있었다. 대 작가가 문화부장에, 실소했으나 그건 오로지 봉사활동. 그 뒤로 주말에 북한산을 등산할라치면 보국문에서 대동문을 넘어가는 진달래능선에서 지인들과 막걸리를 즐기고있는 모습을 여러번 뵈었다.

 

92년 이병주 작가는 타계했다. 신문을 보고 알았다.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졸업 이후 21년 만에 아버지 이병주를 빼닮은 아들 이권기를 만났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그 뒤 또 두절이었다. 어제 전화 통화는 19년 만이다. 그동안 그 친구나 나나 이렇게 무심 무덤덤하게 지냈다.

부산의 어느 대학에 몸담고 있다는 얘기는 오래 전에 인편으로 들은 바 있어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수실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조금 부지런을 떨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화통에 대뜸 내가 물었다. 일어과의 '변방'이 어떻게 일어 박사가 되고 일어과 교수가 되었느냐고. "허허허,살다 보니."  이게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그 친구의 대답이다. 처마 끝에서 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다시 바라다본다. 

 

맺지 못할 운명이기에 조용히 헤어졌고/
뺨 위에 흘러있는 이 눈물은 아마도 빗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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