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31) 버갯속영감

버갯속                                                                                              (31회분)


  쾅! 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조금 전에 서울서 내려와 집사람과 나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 버갯속 영감이었다.

  “어, 버갯속 영감님?”

  현관문을 열자 낙조가 내린 솔밭이 시야를 메웠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진 채 서있는 사람은 아니나 다를 가 버갯속 영감이었다. 역광에 영감의 얼굴이 새카맣게 다가왔다.

  “요거 받어잉.”

  영감은 수인사도 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그려, 요거 약쑥인디...”

  “예?”

  “아즉 덜 말렸스니께... 더 말리야 할 기여.”

  약쑥 두 다발이었다. 하얀 쌀부대에 둘둘 말아 노끈으로 묶여있었다.

  “빨랑 받어랑께.”

  나는 엉거주춤 약쑥을 받아들었다. 약쑥 냄새가 번져났다.

  “............”

  “풀 벤다구 온 사방, 절단을 냈더라니께. 어이구.”

  영감은 입안에 고인 침을 한번 삼켰다.

  “봄부터 봐둔 디 말이여. 가 보니께, 용케 고긴 괜찮더구마. 예전엔 한두 군데만 가두 한 짐이던디... 여러 날 모았슈. 허허 참, 이기 전부랑게...”

  영감은 혼자 말처럼 이어갔다.

  “모다 공분디. 시간이 맞어야 말이여. 내년엔 꼭 한띠 가자구잉.”

  영감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 찼다.

  “창고에서 며칠 말리긴 했는디... 그늘에서 쬐끔만 더 말리라구잉.”

  “............”

  비로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벌겋게 물든 노을이 버갯속 영감을 휘감았다. 숨 가쁘게 넘어가던 태양이 이화산 마루에 비스듬히 걸렸다. 영감의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늘 늦었네 그려. 그러무 나, 가네.”

  영감은 발길을 돌렸다. 새털구름을 헤집고나온 한줄기 빛이 영감의 눈동자를 스쳤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영감의 뒷모습을 바라다보았다. 영감은 서너 걸음을 가다가 돌아섰다.

  “요번엔 말이여... 버개(베개), 한번 맹글어 보라니께.”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무 추석 잘 쇠라구잉.”

  영감은 뒷짐을 진채 어기적어기적 소롯길을 걸어갔다. 뽕나무 사이를 돌아들자 가던 길을 재촉했다. 잦아지는 해거름 연기 속으로 어슴푸레 보일락 말락 하더니 버갯속 영감은 사라졌다.

  

  나는 내년의 단오(端午)를 지금부터 기다리기로 했다.                 끝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쑥  (0) 2009.02.19
귀촌일기- 연재를 마치며  (0) 2009.02.05
귀촌일기- (30) 전화  (0) 2009.02.02
귀촌일기- (29) 약속  (0) 2009.01.28
虛 無 空  (0) 200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