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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9) 약속

약속                                                                                                  (29회분)


  영감은 무덤덤했다. 비문을 읽는 영감의 표정을 보며 나는 씁쓸했다.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오직 지역사회 발전과 주민 생활 향상을 위하여 한 몸 바친 공적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 이에 우리 주민 일동은 공(公)의 갸륵한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정성을 담아 이 비를 세운다.

  1990년 3월 태안읍 도내리 주민 일동 건립’


  비석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

 

  어느 아침나절이었다. 경운기 엔진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귀에 익은 어촌계장의 경운기였다. 내가 뒷문을 열고 나가자 버갯속 영감 아들은 경운기를 급히 세웠다. 경운기 소음이 시끄럽다 생각했는지 얼른 엔진부터 껐다.

  “김 사장님만 보이머 또 일주일이 간거네유.”

  어촌계장은 머리에 쓴 운동모를 슬쩍 들었다 놓으며 인사를 했다.

  “우짠 일로 요새 통... 영감님이...”

  나는 버갯속 영감의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잘 계세유.”

  아들은 가볍게 말했다.

  “하도 안보이시니...”

  “아버진 저보다 더 바빠유. 뭐가 그리 헐 일이 많은지...”

  영감 아들은 웃었다.

  “아, 그러셔도 그렇지...”

  “아까까정 창고에 계셨는디... 지금두 거기 계실거예유.”

  “아이고, 다행입니더.”

  나는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영감에게 별 일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앞뒤의 사정을 잘 모르는 아들은 다시 모자를 들어 올렸다가 제 자리에 놓으며 경운기 발동을 힘차게 걸었다. 시커먼 연기와 요란한 소음을 남기고 경운기는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거... 참.’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맛을 다셨다.


  버갯속 영감의 일가는 고만고만한 거리에 도리도리 살고 있다. 영감이 툭하면 ‘종식이, 종식이’하는 박 씨가 영감의 계매이자 어촌 계장의 고모부다. 그리고 나보다 한 살이 많다. 언덕바지 등성 하나를 이웃해서 살아온 탓으로 가장 손 위 처남인 버갯속 영감과 막내 계매 간에 오고가는 농담이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었다.

  “죽어, 죽어, 아프머 죽어야지유.”

  영감의 허리 타령을 박 씨가 대뜸 잘랐다.

  “어이구, 되설지게 허는 말 좀 들어봐. 그려, 나 죽으머 곶감, 대추 얻어 먹을러구.”

  영감은 거침없이 되받았다. 죽으라는 매제와 못 죽겠다는 처남 간의 공방이 처음 듣는 나에게는 아슬아슬했다. 동네 사람들에겐 하도 오래 묵어 주위의 웃음을 자아냈다.


  박 씨는 봄에는 감자 밭을 초여름엔 고구마 밭을 자기의 농사일 사이사이에 틈을 내 로타리를 쳐주었다. 때로는 부탁하지 않은 길가의 잡초도 어느 날 얌전하게 깎아주었다.

  박 씨의 아내는 집사람과 동갑내기여서 친구처럼 지낸다. 일찌감치 서로 백 원짜리 그림공부 친구로도 자리매김을 했다. 도내의 속사정을 면경 알처럼 들여다보고 있어 우리 집사람은 수시로 조언을 구했다. 한 번도 귀찮다 하지 않아 영락없이 후덕한 시골 아줌마였다. 어느 반상회 날 어촌계장이 집사람의 노래를 처음 듣고 자기 고모의 시대는 이젠 끝났다고 선언했던 장본인이었다.

  여동생은 우리 집사람과 내가 ‘버갯속 영감님, 버갯속 영감님’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재미있어하며 따라 했다. 여동생의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이사람 저 사람을 건너가며 ‘버갯속 영감’이 온 동네에 퍼졌다.

  영감의 여동생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그 때마다 버갯속 영감과 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말도 들리지 않는디. 영감님 허구 친구, 잘도 허시네유.”

  충청도 말이 늘어질 대로 늘어졌다. 오빠인 버갯속 영감에게 말벗이 되어 주는 내가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뜻이었다.

  “잘 봐 주시니까 친구지예. 옛날 같으모 부모 같으신데... 친구라 쿨 수 있습니꺼?”

  “김 사장님과 얘기해 보머 재미있다구. 말끝마다 그러시던디...”

  “영감님이 농담을 더 잘하십니더.”

  “농담을 안 하는 양반이어유. 요샌 달라진개비유.”

  농담을 안 하는 영감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농담을 받아줄 상대가 없었다.


  어느 날, 무슨 이야기를 하다 느닷없이 ‘부지 구석에 납작 공알’을 아느냐고 영감이 나에게 물었다.

  어감에서 먼저 집히는 바가 있어 나는 영감을 쳐다보며 한바탕 웃기부터 했다. 영감은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婦之舅席 納酌恭謁’이라고 또박또박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시아버지한테 며느리가 술잔을 공손하게 올린다. 이 말이여.”

  영감은 엄숙하게 뜻풀이를 했다. 나는 다시 웃었다.

  “요거 봐. 웃을 일이 아녀.”

  “웃어야지예.”

  “요새 납작공알 없슈. 찾어봐.”

  전혀 웃지 않는 영감이 웃자 함께 웃었다. 음담패설도 서슴없었다. 버갯속 영감만이 가지고 있는 향교 풍 우스개가 간혹 선을 보였다. 나도 심심치 않게 답례를 했다. 귀가 안 들리는 영감이니만큼 순발력이 있게 주고받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 전이었다. 우리 집에 놀러온 버갯속 영감의 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버갯속 영감님이 약쑥 이야기 허시데유.”

  “예?”

  “김 사장님과 한띠 가기루 했는디 약속을 아직적 못지켰다구유.”

  “영감님이 약쑥 이야기를 하셨다고예?”

  “그저끼두...”

  영감이 여동생한테까지 약쑥의 약속을 몇 번이나 들먹였다는 건 전혀 뜻밖이었다.

  “올해 못 하모 내년에 하모 되는 긴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그래두 한띠 허기로 헌 건디... 죄끔 그런개비유...”

  “아이고, 고마 적당히 넘어갈 때도 있어야지예. 그럭케 해가지고 우찌 삽니꺼.”

  “허두 꼬장꼬장 해서유. 평생을 그렇기...”

  무양무양한 영감이 아니었다.

  “그걸 동생한테 까지... 좌우당간 못말린당께네예.”

  “그런디, 달븐 사람과 약속이머 몰라두유...”

  “하기야 동네에서 제일로 바쁜 어른이 버갯속 영감님 아입니꺼?”

  “그려유. 바쁘긴 바뻐유. 시상에서 영감님만큼 바쁜 사람, 어디 있깜유.”

  “바쁘다보모 우짭니꺼. 그럴 수도 있지예.”

  “그래두 친구허구 헌 약속인데 지켜야 헌다구...”

  영감의 의지를 여동생을 통해 다시 읽었다.

  “약쑥 갈쳐 주실라다 이래저래 삐끌어져삐릿네예.”

  “뭐시든 가르쳐주는 거이 그리 좋으나봐유.”


  올 초에 새해 인사를 갔더니 버갯속 영감이 책력을 보고 있었다. 태안 시장 통에서 사왔다는 ‘乙酉年 大韓民曆(을유년 대한민력)’이었다.

  “아이구, 아직도 이기 있네예. 이기 언제쩍 건데...”

  빨간색 무늬의 겉장이나 얇실한 두께도 매양 그대로였다. 어릴 때 보던 거라 새삼 신기하고 반가웠다. 사십 여년을 건너 뛰어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온 것 같았다.

  첫 장부터 차근차근 넘겨보았다. 영감은 다가앉더니 내 시선이 가는 대목마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설명하기에 바빴다. 내가 열심히 들여다보자 영감은 연신 벙긋벙긋 웃으며 즐거웠다.

  “요거 김 형이 가져가라구잉. 요댐에 하나 더 사머되닝께.”

  영감은 서랍을 열더니 큰 봉투를 꺼냈다. 책력을 봉투에 정성스럽게 넣은 다음 내 앞에 내밀었다.

  영감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줄 때는 영감 나름대로 격식을 차렸다. 양파 한 망도 좋은 걸 골라 가져다주었다. 책 한 권도 칼같이 약속을 지켰다. 호박 모종도 검은 호박인지 노란 호박인지 표지를 꽂아 주었다. 시골 왔으면 약쑥이 뭔지 알아야 한다며 영감이 앞장서 약속을 했다.


  ‘아까꺼정 창고에 계셨는디... 지금두 거기 계실거예유.’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경운기 소음과 함께 사라진 언덕배기를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추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명절에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 어른이 버갯속 영감이었다.



                                                                                                  계속 연재 합니다. 마지막 2회분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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