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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9) 홀씨

홀씨                                                                                                                (19회)

 

  오월의 아침은 한 낮이나 다름이 없었다.

  “형철씨 있남?”

  바깥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은 도내에서 버갯속 영감뿐이다. 현관문을 열자 역시 영감이었다.     

  “허허, 있네그려. 원제 왔다나?”

  대답할 사이도 없이 영감은 난초 묶음을 불쑥 내밀었다.

  “난초 몇 개 가져 왔네그려.”

  흙이 떨어질 새라 비료 부대 주둥이를 노끈으로 동여맸다. 그 사이로 초롱초롱한 난초 꽃망울이 서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영감과 함께 걸어가다 동네 뒤안길에서 난초를 보았다. 담장 밑에 노란색 파란색 난초가 무리지어 활짝 피어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저절로 자란 토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쪼그려 앉아서 요리조리 쓰다듬어 보았다. 어릴 때 본 기억으로 담 벼랑 밑이나 수채 옆 한갓진 곳에서 잘 자랐다.

  “난초 좋아허대. 몇 개 파 왔지. 수돗가에 한번 심거 봐.”

  영감은 장소까지 지정해 주었다. 허드레 물이 내려가는 수채가 없는 지금 그나마 수돗가가 제자리였다.

  “하도 반가와서 쳐다 본 긴데예.”

  “허허, 입이 싸머 발이 굼뜬 벱이여. 생각 있을 때 허는 기여.”

  “아이고, 영감님예.”

  며칠 후, 영감은 칸나 세 포기와 난쟁이 맨드라미를 예닐곱 포기를 또 가져왔다.

  “요건 담부락 밑이 좋은디...”

  칸나는 현관 계단 양쪽을 발로 콕 찍어주었다. 맨드라미는 대문가에 나란히 심었다. 나이든 어른들이 찾아내는 위치와 장소가 따로 있었다.

  “뭘 자꾸 가져오십니꺼?”

  나는 겸연쩍게 말했다.

  “그게 나 추미네.”

  “예?”

  “무어든 주는 거이 좋아. 다 주고 싶다니께.”

  “주는 게 취미라꼬예?”

  “허허.”

  “별쭉시런 취미 다 봅니더.”

  “뭐라구?”

  내가 큰 소리로 말했지만 영감은 알아듣지 못했다.

  “별난 취미요, 별난 취미.”

  나는 웃으며 영감 귀에다 바짝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별났다구?”

  “예, 취미가 별났다구예.”

  “어허. 별거 아니여. 주는 거만큼 기분 좋은 거이 없어. 돈이 드나, 품이 드나.”

  “전 드리는 게 있어야지예.”

  “허허, 받아야 좋남. 사람 사는 거이 그런 기 아니여.”

  “...........”

  나는 물끄러미 영감을 쳐다보았다.

  버갯속 영감 곁에 민들레 하나가 뽀얀 홀씨를 달고 있었다. 대 끝에 둥글게 홀씨를 단 갓털이 아까부터 조마조마했다.

  “어이구, 이런 거이 있으머 주고 싶다니께. 주어서 고마워 할 사람한테 말이여. 임자가 따로 없슈. 그 사람이 임자여.”

  버갯속 영감은 내 무릎을 툭 치며 말했다.

  한 줄기 불어온 바람에 민들레 갓털이 두둥실 날아올랐다. 두어 번 요동을 치더니 홀씨는 속절없이 흩어졌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 혼자 끌어안고 있으먼 뭐 하남. 허허.”

  영감은 그저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나는 뭉툭하게 남아있는 홀씨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무공(無空)이었다.


  영감은 생각나는 대로 보이는 족족 나에게 갖다 주었다. 때론 줄게 없어 안달을 했다. 그런 영감에 비해 나는 그다지 보답을 못했다. 가끔 에쎄 담배를 사다드리거나 년 말에 가서 일력(日曆) 몇 개 구해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일력 말이여. 알어유?”

  내 귀가 퍼뜩 튀였다.

  “아이고, 알고 말고예.”

  “전에는 한두 개 들어 오구 했는디... 요샌 통 구헐 수가 없다니께.”

  영감이 무심코 푸념을 했다.

  “저도 일력 본지가 한참 됐네예.”

  오랜만에 들어보는 일력이었다. 달력인심이 떠올랐다. 온갖 생색이 났던 달력이 언제부턴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김장 하고 연탄 사고 달력 구하면 새해맞이 준비가 끝나던 시절이 엊그제였다.

  “일력. 태안엔 없슈.”

  적어도 태안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걸 영감은 확실하게 강조했다.

  “서울서 한번 구해 보지예. 오딘가 있을 것 같긴 한데예.”

  찬바람에 종종걸음을 치는 인파에 묻힌 종로통(鐘路通)과 청계천(淸溪川) 거리가 떠올랐다. 카바이트 불빛 아래 좌판을 벌이고 있던 달력 장수가 있어 세모의 정취를 더했다.

  옛날을 믿고 장담은 했으나 조금 걱정이 되었다. 긴가민가하며 서울 시내로 나가 보았다. 워낙 세밑이었다. 을지로(乙支路) 입구에서 겨우 찾아내 남아있던 서너 개를 떨이로 몽땅 샀다.

  “허허, 용케 구했네그려. 워찌 알구서.”

  버갯속 영감의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다.

  “금년에두 부탁허이. 태안에는 아무래두 없슈...”

  올해는 추석 무렵부터 일찌감치 챙겼다.

  “옛날엔 말이여, 뒷간에서 쓰기두 좋구... 왜 안 맹그는지 모르겄슈. 허허.”

  영감은 변죽을 울렸다.

  “한 장씩 찢는 맛도 있지예. 한 장에 하루가 가고...”

  “근디, 김 형이 준걸 보구 달라는 친구가 몇 있슈.”

  이번에는 영감의 친구 몫까지 가지를 쳤다.

  “............”

  “내가 책이라두 받으머 가만이 있남. 뭐라두 주어야지. 김 형이 주는 일력두 그 사람들이여. 내야, 하나먼 되지.”

  영감 나름대로 용도가 따로 있었다. 일력 하나도 돌고 돌아 주거니 받거니 가는 정 오는 정이었다.

  “옛날에는 달력 선물이 최고였지예. 요새야 별거 아니지만예.”

  “물짜가 흔해서 탈이여. 근디, 있어야 할 건 없구.”

  “서울바닥을 훑어서라도 구해드릴께예.”


  일력이 버갯속 영감의 유일한 부탁이었다. 나는 저물어 가는 한해를 일력 숙제로 마감했다. 일력을 받은 영감이 이번에는 어떤 표정을 지을 가 생각하면 새해를 맞는 즐거움이 절로 솟는다.


                                                                                

                                                                                      -연재 계속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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