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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7) 각방(各房)

각방(各房)                                                                                                     (17회)

 

  포도나무의 움이 몽실몽실 부풀었다. 지주의 전선줄을 따라 줄기가 힘차게 뻗어나갔다. 겨우 내 깻묵과 겨를 섞어 묵혔던 거름을 이른 봄에 듬뿍 주었다. 내 정성을 알아본 듯 송알송알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달렸다. 하루가 다른 양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만큼 귀여웠다.

  어느 날 윤태 네 아지매가 우리 집 뒤 생강 밭에 약 주러 왔다가 포도나무를 만지고 있는 나를 보자 다가왔다.

  “요렇게 질러줘야 해요.”

  윤태 네는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포도가지를 사정없이 뚝뚝 꺾었다. 포도송이가 갓 달린 새 순이 그대로 발밑에 나동그라졌다.

  “저 말이예요, 포도에 대해 조금 알거든요.”

  뜨악하게 서 있는 나를 정색을 하며 안심시켰다. 윤태 네는 계속 날렵하게 손을 놀렸다. 순식간에 땅바닥은 어린 포도가지로 질펀했다.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보아 얼기설기 자라나는 포도 줄기가 윤태네 눈에 대단히 갑갑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요렇게 하셔요.”

  윤태 네 아지매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시범은 시범. 윤태 네처럼 나는 모질게 다룰 수가 없었다.


  가뭄이어서 채마밭에 물주는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낸다는 옛말이 실감났다.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에 사정없이 퍼붓는 뙤약볕은 대단했다. 갓 심은 모종일수록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한순간에 말라버렸다. 종이 고깔을 씌워보았으나 수시로 엇바뀌어 부는 바람에 당찮았다. 아침저녁으로 호스를 늘어뜨려 동 서 밭을 오가며 나는 부지런히 물을 주었다.

  “채손 말이여, 그렇키 물을 자꾸 주는 기 아녀.”

  영감은 기어이 한마디를 했다.

  “상추도 물을 무야 할 거 아입니꺼?”

  소사나무를 떠올리며 나는 퉁명스레 되받았다.

  “허허, 고스럼헌 맛이 없어진다구... 짬 없이 주는 거이 좋은 기 아니라니께 그러네.”

  내가 딴죽을 건다고 생각했는지 영감은 슬그머니 역정을 냈다.

  “.............”

  “알긴 아남? 물배추란 말 말이여. 덩치만 크고 아무자개두 맛이 없다니께.

허허, 그런 기 장에선 금이 더 나간다더구마. 사람들 입맛은 나도 모르겄어.”

 

  “허, 이 집, 각방(各房) 쓰는감?”

  병찬 할매는 집사람과 내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방 저 방을 둘러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마을 어귀에 사는 할매는 버갯속 영감의 바로 아래 제수씨로 한창 때 이 동네의 우물가 여론을 주도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살아있었다.

  어느 날 병찬 할매가 안마을로 가다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이불을 개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

  “갤낀데... 본디 게을러서예.”

  나는 진작 이부자리를 정돈하지 못한 실례를 게으름으로 얼버무렸다.

  “각 방 쓰는 것도 들키고... 겨드랑이 점까지 다 들통 나겠구마.”

  병찬 할매가 간 뒤에 나는 집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집은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다 길가여서 오다가다 들리는 동네사람들이 많았다. 사람 사는 집이라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았다. 몇 번 드나들다보면 보이는 건 다 보였다. 버갯속 영감이 해우하는 모습도 하루아침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다. 세월이 빚어낸 풍화작용이었다.

  얼마 전에도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현관문을 흔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병찬 할매였다.

  “도둑도 없는디, 대낮에 문은 뭐 그리 잠구고 있�?”

  현관을 들어서며 나에게 핀잔부터 주었다. 말 마디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더. 그렇네예.”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러섰다.

  아직 도시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탓이었다. 드나들 때마다 집사람이나 나나 버릇으로 현관문을 잠갔다. 병찬 할매의 준엄한 지적이 있은 이후로 문 잠그는데도 심사숙고를 하게 되었다.

 

  곧 닥칠 장마가 걱정스러웠다. 비닐하우스 짓는 공사와 마당의 배수로 공사, 그리고 축대 틈새에 메지 흙을 채워 넣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질구레한 공사에 너무 얽매이는 것 같아 가끔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어쩔 수 없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흙집이라 들이치는 비바람을 막아줄 처마 공사가 급했다. 규모가 큰데다 집 전체 모양새를 궁리하며 가을로 미뤄야겠다.

  “좀 기다려보슈. 하우스는 내가 지어줄텐게유.”

  동네에서 젊은 축에 드는 협력회 회장이 호기를 부렸다.

  “가을걷이가 끝나머 걷어내는 하우스 골조가 생긴다니께요. 그 걸루 지으머 돈도 얼매 안들어유.”

  한량없이 고마운 말이었다. 가을까지 홍시 떨어지길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공짜도 결국 돈이기에 자재와 인부를 사서 나는 일찌감치 짓고 말았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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