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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6) 똥

                                                                                                                         (16회)


  농사는 시절을 다투었다. 곡우, 망종에 뿌리고 백로, 상강에 거둔다. 동네 사람들의 잰 발걸음에 나도 맘이 바빠졌다. 외지인 땅도 놀리지 않았다. 하물며 내 땅이야. 동네 사람들의 눈이 있어 조바심이 났다. 초보 농사꾼으로 의욕이 넘쳤다. 잡히는 게 일거리고 보이는 게 할 일이였다. 어깻죽지가 늘어지고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까지 욕심을 부리면 도내에서 갈매기 보기는 다 틀렸다.

  버갯속 영감이 호박 모종 두 판을 가져왔다. 한 판은 ‘검흔 호박’, 다른 한판은 ‘누런 호박’이었다. 검은 플라스틱 모종판에는 나무 팻말이 얌전하게 꽂혀있었다. 헷갈리지 않도록 영감이 직접 붓으로 썼다. 모종을 낼 때부터 나에게 줄 요량이었다.

  “어이구, 호박 심을 줄은 아남?”

  감탄사를 동반하며 영감이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영감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나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어 머뭇거렸다.

  “호박 자리는 거름이여.”

  영감은 진득이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똥이지예.”

  그 순간 불쑥 한마디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후련했다. 생각할수록 명답이어서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려. 똥을 아나벼.”

  “똥은 똥이지예.”

  “요샌 똥이 없슈.”

  “똥 없으면 가분다리지예.”

  “배고푼 건 참아두 똥은 못 참어. 똥은 그런 거여.”

  “정직한께네예.”

  선문답 같았다. 오늘의 화두는 똥이었다. 대변, 소변이 격조 운운은 몰라도 똥, 오줌보다 정감이랄까 맛은 없다. 영감과 나는 똥에서 죽이 맞았다. 똥이라면 영감과 견줄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들었다.

  한참 잊고 살았다. 어린 눈에 많이 보았다. 길가 하얗게 서리를 맞은 개똥이었다. 어른들은 망태기에 주워 담아 거름자리에 보탰다. 거름(糞)은 금(金)이었다. 선조는 먹는 것보다 똥을 먼저 가르쳤다. 똥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나는 똥에서 순리와 겸손을 보았다.

  거름이라면 역시 인분이었다. 통시, 똥 구시, 똥 장군, 똥바가지가 눈에 선하다. 구시를 지나다보면 달보드레한 향내가 났다. 진정 고향의 냄새였다.

  “호박 자리엔 가이(개) 똥 이상... 없슈. 서너 무데기 만 넣어보라구.”

  영감은 개똥 이야기로 이어갔다.

  “그렇지예.”

  나는 장단을 맞추었다. 화석이 되어버린 과거를 버갯속 영감과 나는 지금 똥으로 되살리고 있었다. 사람 똥도 없고 개똥도 없는 세상이 허전했다.

 

  호박 구덩이를 미리 파서 삭힌 음식물 쓰레기와 돼지 똥 퇴비를 일찌감치 섞어 넣어두었다. 모종이 거름 냄새를 맡자 물이 올랐다. 두어 번 비를 맞고 나니 사방으로 줄기를 뻗었다. 

  아래 밭뙈기는 감자를 심었다. 풀밭인지 감자 밭인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잡초가 제 난양으로 판을 벌여 여지없이 초원이다. 비록 감자알은 작을지언정 맛은 있을 거라며 첫 농사에 최면을 걸었다. 농협 자재 마트에서 ‘태안 감자’가 찍힌 보루박스 일흔 개를 시간 날 때 사다 두었다. 하지(夏至)에 감자를 캐낸 자리에는 연이어 황토 고구마를 심을 요량이다. 여기 사람들은 감자도 감자고 고구마도 감자라고 불렀다. 

  경운기는 몰라도 트랙터나 콤바인처럼 덩치가 큰 농기계를 집집이 가지고 있지 않다. 이집 저집 돌아가며 바섬(바심)을 했다. 순서를 기다리다 자칫 밀리면 장마에 맞닥뜨린다. 고구마 로타리 칠 걱정을 서둘러 하자 영감은 ‘현수한테 부탁혀 봐.’하고 단숨에 말했다. 아들인들 여러 곳에 산재한 전답과 산판에 집안일만 해도 눈코 뜰 사이 없었다. 게다가 어촌계장까지 맡아 회의에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엇따, 열심히 허긴 허누마.”

  버갯속 영감이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경로당 출근길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근디 아침부터 웬 땀을 그리 흘리누?”

  “본래 땀이 좀 많십니더.”

  “쯔쯔쯔, 난 땀이라군 안 난다니께.”

  초여름이 되자 움직였다하면 얼굴부터 땀이었다. 안경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심지어는 라면 그릇에도 순식간에 빠졌다. 별미 라면 안경탕을 혼자 웃으며 먹었다. 안경테에 끈을 달아보았으나 그것도 마뜩찮았다.

  “근디 농사를 해보긴 했깐? 쬐끔 알긴 알데.”

  “들은 풍월로예.”

  “감자를 재로 소독하는 건 워디서 배웠남? 요샌 그리 하는 사람이 없는디...”

  “어릴 때 쪼끔 본 겁니더.”

  “옛날에는 잿깐이 있었슈. 오줌도 가져다 붓구...”

  “그렇네예. 헛깐도 있었고예.”

  “이왕지 할라머 지대로 혀봐. 숭내만 내지말구.”

  “따라 하다보모 되겄지예.”

  “그리 쉬운 게 아녀. 농사라는 기...”

  “제가, 농사는 무슨 농사예. 흙냄새가 좋아서지예.”

  “허여간 대단혀. 요기 온 것만 혀두. 다들 나갈려구머 허는디.”

  “감자 심고 수수 심고 그럴람니더.”

  나는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그려. 근디, 원제꺼정 왔다갔다 할끼여? 도로비 내구, 기름 태우고 말이여.”

  “영감님이 와라카모 언제든지예.”

  “허허, 별 소리... 알아서 하는겨.”

  “곧 올낍니더.”

  “난 서울 가서 하루도 못살것대. 말동무가 있나, 갈 데가 있나. 어이구, 죙일 벽 만보고 앉아서 말이여.”

  “지 사는 데가 있는 갑심더.”

  “그려. 요기두 살만 혀. 옛쩍 도내가 아녀.”

  영감은 발아래 간사지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엊그제 내린 비에 물꼬를 손질하는 사람들이 한가로웠다. 길게 누운 저수지는 아침 햇살에 비껴 은빛 물결로 가득했다.

  “다 영감님 덕분이지예.”

  “허허. 저거 보라구. 책책 심었다니께. 곁가진 뿐질러 줘.”

  영감의 시선이 토마토 밭으로 옮아갔다. 모종을 심을 땐 제법 간격을 둔다고 두었으나 이내 땅 넓고 하늘 높은 줄 알았다. 이어질 뻔 했던 ‘버갯속 영감 스토리’는 토마토 때문에 건너뛰었다.

 

  우리 채마밭은 동쪽 끝과 서쪽 끝 둘로 나누어져 있다. 두 곳 다 자투리 텃밭이다. 집사람과 나는 동 밭, 서 밭으로 구별한다. 동 밭에는 상치와 토마토, 가지를 심었다. 서 밭은 고추와 오이, 참외, 수박 그리고 들깨다.

  태안 시장에 갈 때마다 무슨 모종이 있나 둘러보는 일도 일상의 재미가 되었다. 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는 지지대를 세워주어야 마파람에 견뎠다. 땅으로 기는 수박과 참외는 잡초 등쌀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잘 자라는 오이에 쓸데없이 거름을 더해 몇 그루가 비실비실해졌다. 노랗게 말라가는 새끼 오이들을 바라보며 하잘 것 없는 욕심을 후회했다.


  집 주위에는 사과, 배, 복숭아, 포도, 감, 무화과, 대추, 매실, 모과, 석류를 심었다. 나중에 빼낼 땐 빼내더라도 빼꼭히 심어두었다. 거의 묘목인데다 몸살을 하는 바람에 제구실을 하려면 사 오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유실수(有實樹)가 아닌 건 느티나무와 서재 옆 벽오동뿐이다. 

  수돗간 둘레에는 진주에서 방아를 구해다 심었다. 방아는 몇몇 남쪽지방 사람들만 아는 야생초(野生草)이다. 된장찌개나 부침에 몇 잎 살짝 넣으면 특유의 향이 그저 그만이다. 이놈은 토종 잡초의 텃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잡초에 곤혹스런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씩씩하게 자라니 기특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박 씨네 아주머니가 자기 밭에 뿌리고 남은 찰옥수수 씨앗을 한 봉지 주었다. 밭 가장자리에 서너 알씩 슬쩍슬쩍 뿌려두었다. 감자를 심을 때는 자주색 씨감자를 줘서 두어 고랑 심어보았는데 어떨지 지금부터 궁금하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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