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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3)석전

석전                                                                                                                   (13회)

 

  나는 마당에서 톱 일을 하고 있었다. 봄에 심은 포도나무 다섯 그루가 가지를 더 뻗기 전에 지주를 세워줄 요량으로 나무 막대의 길이를 재서 잘랐다. 그동안 한다한다 하면서 미루어 왔던 일이었다.

  “허허, 오늘 뭐하남?”

  버갯속 영감이었다. 목소리가 경쾌했다.

  “어이구, 외어손잽이로구머.”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영감은 처음 알았다.

  시선을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시야에 들어온 영감은 여느 때의 버갯속 영감이 아니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구두까지 갖춘 신사복 차림에다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얌전히 가르마를 탔다. 검정 색 정장에 바지는 줄이 섰다. 넥타이를 맨 영감을 몇 번 본 적은 있으나 머리에서 구두까지 반짝반짝 광을 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이구, 풍뎅이가 미끄러져 졸도하겠시유.”

  내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영감 입가에는 벙긋벙긋 웃음기가 흘렀다. 너 댓 시라고 하지만 한낮이었다. 영감의 이마와 머리칼은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에 빛이 났다. 버갯속 영감과 나는 마당 가운데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왠일이세유? 좋은 날인갑지예?”

  나는 충청도 말에다 경상도 말을 잇댔다. 내가 들뜬 기분이었다.

  “허허.”

  영감은 그저 웃기 만 했다. 만족스런 하루를 보낸 즐거움이 영감 전신에서 우러났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했다. 그랬다.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구, 허리야.’하는 영감의 첫 인사가 없었다. 의례적인 수사가 없으니 나사 하나가 빠진 느낌이었다.

  “허허. 나 오늘 행교에 다녀오는 길일세.”

  “왠 일루예?”

  “오늘 석전(釋奠)이 있었시유.”

  “공자님 제사예? 공자님이 놀랬겠십니더.”

  “공자님이 놀래더냐구? 어이구, 내가 놀랬슈.”

  “무신 일이 있었습니꺼?”

  “근디... 옛날 같지가 않슈. 왠지 썰렁혀.”

  영감은 갑자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거참, 공자님이 쪼끔 서운했겠는데예.”

  “그보다두 큰일 났씨유. 시상(세상)이 이래서는 안되는디...”

  “예?”

  “허허, 왔으머 말이여 지대로 허든지... 저번 옥파(沃坡) 선생 기일(忌日)에두... 어이구, 생가(生家) 안에서 담배 물고, 뒷짐 지는 이가 없나. 명색이 유지라며... 쯔쯔.”

  영감은 답답했던 사연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하긴예. 너나없이 건성이라예. 뭐에 바빠서 그런지... 다들.”

  “성의가 없는 거여. 뉘긴 날 때부터 혀?”

  “영감님 오늘 화가 많이 나셨네예.”

  “나 화 낸 적 없슈. 화 안내.”

  “...............”

  “바쁠수록 둘러가라구 했슈. 한 번을 허더라두 지대로 혀야지. 이래 가지구서야 커는 애들이 뭘 배우겠슈. 옛날 말에 틀린 말이 없다니께.”

  요모조모 영감을 뜯어보았다. 볼수록 물 찬 제비 같았다. 한창 젊을 때 영감의 모습도 상상이 되었다. 갑자기 내입이 근질근질 했다.

  “그런데 공자님만 보고 그냥 오십니꺼?”

  “할 일이 뭐시 있남? 어이구.”

  “읍내 출입에 분 냄새도 좀 맡고...”

  “분 냄새? 허허.”

  “못이긴 척하고예.”

  “나, 이 사람. 머락허는지 모르겄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말입니더.”

  “뭐시여? 난 그렁 거 몰러.”

  영감은 단호했다. 나는 불을 지피고 영감은 불을 끄며 제 갈 길을 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나의 말대답이 싫지는 않은 듯 영감의 얼굴은 화목했다.

  “모르긴예?”

  “어허, 이봐. 읍내 간 김에 이발 허구... 약도 타구... 그 담에 할 게 뭐가 있남?”

  영감은 갑자기 아래 위 호주머니를 헤집었다. 바지에서 약 봉지를 꺼내 내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오줌약이여. 시간이 있길래 허리에 침두 맞구, 물리치료도 했슈. 허허, 좋은 시상이여. 오백 원 내라대. 요새 오백 원이 돈인겨.”

  영감에게 살맛나는 하루였다. 영감이 누렸던 느긋함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기분 좋은께네예 허리도 안아픈갑심더.”

  “글시., 반짝이여.”


  나는 톱일 일랑 제쳐두었다. 영감의 등을 떠밀어 거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영감의 자리는 어김없이 당신의 고정석이었다. 영감의 차림새에 놀란 집사람이 수다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영감은 연신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아주머니요. 이 사람 물 좀 들이라구 하슈.”

  영감은 앉자마자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가리키며 대뜸 큰소리로 말했다.

  “글쎄 말입니더.”

  “젊은 사람 머리가 이래가지구서야. 이리 둘거유?”

  “시킨다고 합니까.”

  집사람인들 웃고만 있었다.

  “나 좀 봐. 그려, 센머리에 도내에 와서 일만 할끼여?”

  영감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말쑥한 차림새가 새삼 부담스러운 듯 영감이 분위기를 앞서나갔다.

  “그렇네예. 여기 오모 좀 놀라캤는데, 이거 꺼꾸로 됐십니더.”

  “어이구, 괴기도 잡아 보라니께. 줄창 땅만 파지 멀구...”

  “여태 백화산, 팔봉산도 못 올라 가봤다카모 말 다했지예. 섭천 쇠가 웃을 일입니더. 우짜다 하루 이틀 왔다감서 어느 천 년에예.”

  “요거 봐. 조 집, 배 춘우 말이여... 괴기 잡는디 박사여. 같이 가봐.”

  영감은 턱을 들어 이웃 배 선생 집을 가리켰다.


  배 선생은 모터가 달린 조그만 배를 한척 가지고 있다. 물때에 맞춰 바다에 나가 장어나 우럭을 잡는다. 도내나루터 주위 갯골을 따라 개막이 어장이 집집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가까이 있다. 그물에는 철따라 광어, 숭어, 전어가 걸렸다. 때론 게장을 해 먹으라며 박하지를 푸짐하게 담아준다.

  마당에서 그물을 정리하다 내가 보이면 오라고 부른다. 입만 갈수 없어 나는 소주 두어 병을 챙긴다. 어떨 땐 초고추장도 가져오라고 배 선생이 소리를 질러준다. 순창 초고추장 재고 몇 개는 냉장고에서 늘 들어있다.

  잠시 배 선생의 지시에 따라 벼리를 당겨준다든지 그물코에 걸린 고기를 같이 털어낸다. 대충 정리가 되면 하던 일을 밀쳐놓고 즉석 회 파티를 벌인다.

  다라 안에는 아직 우럭이 펄떡펄떡 뛰고 있다. 우선 큰 놈 서너 개를 고른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물기를 닦아낸 다음 살짐을 발라낸다. 칼이 잘 안 나간다 싶으면 가까이 있는 돌팍에다 벅벅 몇 번 문지른다. 눈으로 귀로 오감이 맛깔스럽다.

  발라낸 살짐에 칼을 넣어 껍질을 비껴서 슬쩍슬쩍 회를 뜬다. 배 선생 얼굴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능란한 손놀림에 절로 군침이 돈다. 당장 나도 따라 할 것 만 같다.

  외려 젓가락이 거추장스럽다. 분위기나 맛을 돋우는 덴 만년구짜 손가락이 낫다. 먼저 소주잔을 맘껏 부딪쳐 한잔씩 걸친다. 짜릿하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한 줄기 느낌은 이 세상 어디도 없는 맛이다.

  회 한 점을 집는 순간 바닷바람이 와 닿는다. 졸깃졸깃하기는 역시 태안의 우럭이다. 배 씨 아주머니가 한 사발 갖다 논 게꾹지 안주가 입을 씻어준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을 불러서 한 잔 술 권하는 즐거움은 금상첨화다. 

  배 선생 집 창고의 처마 끝에는 긴 간짓대 두 개가 하늘 높이 세워져 있다. 간짓대 끄트머리에는 도롱태가 달려있어 마치 국기 게양대처럼 보인다. 망둥어와 우럭을 손질해 대꼬챙이에 꿰어 여기에 달아 올려서 말린다. 시도 때도 없이 꼬이는 파리 떼를 따돌리는데 그저 그만이다.

  우리 집에서 보고 있노라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모양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나도 머지않아 그런 풍경을 연출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러나 저러나 집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에 할 일이다.


  “그렇찮아도예, 몇 번이나 같이 가자 카는데... 이차 판에 그럴 정신이 있어야지예.”

  “갯가 살머 난 고기는 못 잡아 봤어. 재미있다데.”

  “재미있으모 해 봐야지예. 지금이라도.”

  “난, 안혀. 배 씨네와 허라니께.”

  “금년은 아무래도 틀렸고예, 내년엔 우짤찌.”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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