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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4) 유천희해

유천희해                                                                                                (14회)


  “근디... 조게 무언겨?”

  낚시 이야기를 하다말고 영감이 갑자기 일어섰다. 영감이 발견한 건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에 걸린 그림이었다. 영감은 그림 앞으로 다가가더니 위아래를 훑으며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허허, 종이가 아니네그려. 워디서 나온겨?”

  “종이가 아니고 벱니더.”

  커튼을 하고 남은 캔버스 천에다 황토를 풀어 물을 들였다. 황토는 도내에 지천으로 있었다. 고무 다라에 담가두었다가 평석에서 말렸다가를 한 주일 씩 한 달 가까이 되풀이했다. 처음 해보는 거라 어떨 가 궁금했는데 천연 황토색깔이 의외로 은은했다.

  이 천을 물에 헹구고 마름질했다. 먹을 갈아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자도 몇 자 썼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우리 집과 뒤로 당도와 멀리는 구도 포구가 배경이다. 갈매기가 날고 어선도 두어 척 떠있다. 팔봉산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 가에 있는 걸로 보았다.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대상만 그렸다. 그려놓고 보니 세한도(歲寒圖) 냄새가 났다.

  “직접 그렸남?”

  “연습삼아예.”

  “허허, 이 사람 보게나.”

  버갯속 영감은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근디... 조 글은 뭐여?”

  “‘遊天戱海(유천희해)’입니더.”

  나는 영감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바닥에 글자를 써 보이며 손짓 발짓을 해보았으나 전달이 되지 않았다. 애당초 한 두 마디로 설명이 될 글자가 아닐 뿐 더러 나도 자신이 없었다. 영감은 눈을 껌벅거리며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도시 무신 말인지 모르겄네 잉.”

  갑갑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놀고 있네.’ 입니더.”

  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왔다.

  “허허, 놀고 있다구?”

  영감은 고개를 끄떡이며 알듯 모를 듯 피식 웃었다. 버갯속 영감이 놀고 내가 놀고 영감과 나는 같이 놀았다. 이 순간 나는 유천희해와 달관을 떠올렸다. 그 사이에는 자유인, 버갯속 영감이 누리는 무아(無我)의 경지(境地)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이겁니더예.”

  나는 유희(遊戱)가 생각났다.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가 펴지려할 즈음에 영감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 사람, 별걸 다해... 그림은 워디서 배운겨?”

  “그냥 해본 깁니더. 배우긴예.”

  “허여간 재주꾼이여.”

  영감은 검지를 내밀어 아래위로 흔들었다.

  “근디... 호(號)는 있남?”

  나는 대답대신 메모지에다 ‘又岩(우암)’을 써보였다. 연이어 ‘石浦(석포)’를 나란히 썼다.

  “허허, 우암이라구. 난 석포일쎄.”

  영감은 우암(又岩) 옆에 쓰인 자신의 호를 뒤늦게 보았다.

  “허... 내 호는 워찌 알았남?”

  영감은 실눈을 크게 떴다.

  “도내에서 영감님 호 모르모 간첩아입니꺼.”

  “허... 거참!”

  “그렁께네, 우암(又岩), 석포(石浦) 둘을 합치모 암석이네예. 돌띵이 말입니더.”

  “허허.”

  영감은 그저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암석지교(岩石之交)’를 떠올렸다. 뜻으로나 어감으로나 그럴 듯 했다. 오늘 비로소 버갯속 영감과 나 사이에 새로운 교의(交誼)가 샘솟는 것 같았다.

  영감과 나는 절차와 예의를 지켜 통성명을 하지는 않았다. 얼레 설레 판에 이름을 알게 되었고 오늘은 호를 주고받았다.

  ‘암석지교.’

  저물어가는 가을,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황혼의 우정이었다. 바위처럼 단단해 스쳐가는 바람 같은 우정이 아니기를 나는 바랐다.

 

  “보니께, 김 형 글씨가 아조 좋아. 이 담에 부탁할 거이께 써 줘잉.”

  버갯속 영감은 글씨 얘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아마 상량보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이구, 써드릴 글이야 되야지예.”

  “아니여. 시간 나머 우리 집도 하나 그려주구잉.”

  “그림이모 몰라도예.”

  “그런디 우리 아부지 호는 농은이여.”

  영감은 내가 쥐고 있던 볼펜을 빼앗다시피 받아들었다. 조금 전에 내가 쓴 우암, 석포 옆에다 영감이 꾹꾹 눌러가며 또박또박 글을 쓰기 시작했다. ‘農隱(농은)’이었다. 내가 놀란 건 바로 그 때였다. 획수가 틀림이 없을 뿐 아니라 글씨에 힘이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영감이 글자와 담을 쌓은 줄 알았다. 글씨를 나에게 보여줄 기회가 그동안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영감은 한 번도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구, 이거 보통 글씨가 아입니더.”

  나는 중지로 O자를 만들어 보였다.  

  “뭐시라구? 글이 형편없다구?”

  나는 웃었다. 당신을 칭찬하는 말이다 싶으면 늘 이런 투로 되물었다. 그 때마다 나는 혼자 웃곤 했다. 영감의 필체는 한창때 잘 나간 글씨가 분명했다. 나는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거 표구(表具) 할랍니더.”

  “뭐시라구?”

  “제가 졌십니더예.”

  “뭐여?”

  버갯속 영감과 나는 마주보며 웃었다.


  벌써 사십년이 지났다. 스무 살 남짓 되는 그 만한 나이 때는 다들 그런 분위기에 한번 쯤 젖어보고 싶어 했다. 대학시절 겨울 방학 때였다. 이불 보퉁이에 책 몇 권 싸들고 절간에 들어갔다. 한 달여 동안 나는 다솔사에 속해 있는 봉일암(鳳逸庵)에 있었다.

  가끔 암자를 내려와 효당(曉堂) 조실을 뵈었다. 효당은 제헌의원을 지낸 분이었다. 조실은 방장산 언덕바지에서 재배한 반야차(般若茶)를 손수 달여 주었다.

  어느 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간간이 산 까치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그날따라 산사의 창호지 문틈으로 햇빛 한줄기가 회초리처럼 새어들었다. 청동 화롯불에서 피어나는 차향이 온돌방을 채웠다.

  ‘遊天戱海.’

  강당 한가운데 걸려있는 편액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효당은 대답대신 편지 봉투를 잘라 만든 메모지에다 천천히 써 내려갔다. 효당이 잡은 몽당연필 끝이 살짝 떨렸다.

  ‘遊曆諸天戱豫法海(유력제천희예법해)’

  효당은 ‘遊(유)’자, ‘天(천)’자, ‘戱(희)’자, ‘海(해)’자 옆에 방점을 찍듯이 동그랗게 표시를 했다. 효당 조실은 추사(秋史)가 쓴 ‘山崇海深 遊天戱海(산숭해심 유천희해)’의 의미를 외려 나에게 물었다. 내가 무어라고 했더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며 빙그레 웃는 조실의 표정이 엊그제인양 새롭다.

  

  유희. 생각할수록 꿈결 같았다. 국민학교 이 학년 때 쓴 일기책에 학예회에서 ‘유희’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여러 사람 앞에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섰던 첫 기억이 나에겐 유희였다. 버갯속 영감은 잠자는 나를 수시로 깨웠다.

  오늘 영감의 완벽한 차림새부터 나를 즐겁게 했다. 머릿기름에 날이 선 바지가 그렇고 암석지교의 우정이 그랬다. 이런저런 기분이 넘쳐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까부터 내 시선이 가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탁자 위에 있는 여자 나체상이었다. 오래 전 필리핀에 연수를 갔다가 사온 호두까기 목기였다. 팔등신보다 더 날씬했다. 양쪽 다리를 벌린 다음 사타구니 사이에 호두를 끼워 두 다리를 조이면 호두가 깨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렇게 호두를 깨본 적은 없다.

  나는 나체 호두까기를 슬며시 손에 들었다. 오른손 왼손 옮겨가며 한참 만지작거렸다. 버갯속 영감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영감의 시선을 끌기위해 손바닥으로 툭툭 치기도 하고 영감 앞에다 얼른거려보았다. 영감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만 계속했다. 못 보았는지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내가 답답해졌다. 몇 번 사타구니를 벌렸다 닫았다하며 탁, 탁, 소리를 냈다. 그 때야 영감의 반응이 나왔다.

  “에이, 에이.”

  영감은 치우라는 표시로 손사래를 쳤다. 영감이 곁눈질을 해서 보기는 보았다. 나는 영감에게 다가앉았다. 영감의 손에 슬쩍 갖다 댔다.

  “에이, 에이.”

  영감은 오뉴월 파리 �듯이 밀쳐냈다. 그럴수록 나는 바싹 다가갔다. 내가 다가앉을수록 영감은 뒤로 밀려났다. 밀고 밀리는 형국이었다. 마침내 나는 호두까기를 버갯속 영감에게 덥석 안겼다.

  “에이, 이 사람. 어허.”

  한 손을 방바닥을 짚은 영감은 엉덩이를 들어 뒤로 물러앉았다. 말쑥한 차림새에 당황해하는 버갯속 영감의 표정이 환상적이었다.

  “오데 물어 뗍니꺼? 한번 만져보시기나 하이소.”

  나는 재빨리 영감의 검지를 당겨 젖꼭지에 갖다 댔다.

  “어허, 이 사람 보게. 어허.”

  영감은 화들짝 놀라며 내쳤다. 하마터면 호두까기 미녀가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 했다. 가까스로 미녀를 부여잡으며 나 혼자 크게 웃고 말았다. 희극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가. 영감은 진정한 듯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감은 아래 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엄숙 중(嚴肅 中)이었다. 나는 호두까기를 내내 만지작거렸다. 영감은 꼿꼿하게 앉아 일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근디 말이여... 약쑥이 있는 델 한번 가봐야 하는디...”

  “............”

  “왠 대사집(혼사집)도 그리 많다나. 당최 가볼 시간이 없슈. 허허.”

  버갯속 영감은 약쑥 이야기로 슬그머니 분위기 탈출을 시도했다.

  

                                    *연재가 늦었습니다. 쯔쯔가무시 때문에 한 열흘 혼났습니다.

                                            농촌에 살다보니  말만 듣던 경험을 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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