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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5) 갓 끈

  갓 끈                                                                                          (15회) 


  사람들은 우리 집을 ‘황토집’이라 부른다. 내 이름은 몰라도 인근에 ‘도내리 황토집’으로 알려졌다. 도내리 황토집. 부르기 편하고 듣기 좋으면 다 좋다.


  벽돌을 쌓는 일만 집을 짓는 게 아니었다. 이웃 간의 유대는 터전이자 기초였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며칠 전에는 서너 집이 추렴을 해서 만리포 조금 못 미쳐 모항(茅項)에 장어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이장 모조(모곡)도 냈다. 을메기(새참)에 빠뜨리지 않고 불러주었다. 꿩 탕, 토끼 탕, 잉어찜도 도내에 와서 처음 먹어보았다. 배꽃이 필 무렵에 알이 꽉 밴다는 설기가 반가웠다. 가재 사촌같은데 쌉싸름한 맛이 내 입에 맞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경로당에 인사를 갔다. 가져가는 물품이라야 떡 방앗간에 미리 맞춰둔 시루떡과 맥주, 소주, 과일들이다. 이삼일 전에 회장인 버갯속 영감에게 날자와 시간을 알려두면 제시간에 빠짐없이 모였다.

  누군가가 기증을 한 노래반주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아무도 작동시킬 줄을 몰라 내내 놀렸다. 이날이 반주기가 오랜만에 빛을 보는 날이다. 한잔 두잔 술이 쌓이자 마이크 쟁탈전이 벌어졌다. 깔아주는 멍석만 있다면 신명은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였다. 집사람은 아파트 단지 내 주간 보호실과 치매센터에 봉사활동을 하는 경험으로 노인들의 분위기를 곧 잘 휘어잡았다.

  매번 참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강권으로 집사람은 어도(漁島) 부녀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철따라 농작물이나 감태와 굴을 서울에 가져다가 이웃이나 친지들에게 돈 사주었다. 버갯속 영감의 매제인 박 씨의 큰 딸이 얼마 전에 부천에 꺼먹돼지 삼겹살 음식점을 냈다. 가게가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가끔 직원들의 회식을 거기서 가졌다.

  안도내는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 바다와 전답이었다.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며 몸은 고단했으나 마음은 따스했다. 크게 ‘부자 마을’은 아니더라도 살림살이가 삭막하지 않았다. 집에 김치냉장고가 없는 걸 오히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뒤늦게 하나 샀다. 오고 가며 이렇게 저렇게 도내사람이 되어갔다.

  “길게 보세유.”

  첫 반상회 때 버갯속 영감 아들인 어촌계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입장료를 내야지요.”

  내가 맞장구를 쳤는데 절묘했다. 갈수록 궁합이 맞아 혼자서 무릎을 친다.

  나는 가끔 버갯속 영감의 해우를 떠올린다.

  ‘인생을 어렵게 살 필요가 있남?’

  영감이 조용히 묻는 것 같다. 그저 무던하다는 말을 듣는 쪽이 내가 가는 길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취한 술기운에 첫 잠이 들었던 나는 혼비백산해 일어났다. 열 두 시가 지난 야밤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두 얼굴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옆집 배 선생과 문 반장의 나란히 서있었다.


  “같이 갔으면 유, 올 때도 같이 와야지유.”

  배 선생의 일갈이 정수리 쳤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나는 몸을 추스르며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얼른 거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술이 취하긴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워째 혼자 오남유? 이웃에. 그런 벱이 어딨슈?”

  자리에 앉자마자 배 선생의 추달은 계속 되었다.

  “맞는 말씀입니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더.”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같이 온 문 반장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린 채 배 선생 옆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옆 집 배 선생은 평소 친하게 지냈다. 배 선생이나 나나 권하는 술은 마다하지 않았다. 나보다 다섯 살 위 인 데다 안동네와 떨어져 있는 유일한 이웃이어서 오갈 때마다 인사를 차렸다.

  그날은 한식이었다. 박 종식 씨 집에 묘사가 있었다. 흩어져있던 조상들의 유택을 마을 입구에 있는 선산에다 한데 모셨다. 그날 나는 혼자 도내에 내려오는 길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동네 어귀가 떠들썩했다. 육 이장도 보이고 문 반장에다 멀리 살고 있는 박 씨의 자손들은 물론 인근에 있는 친지들까지 다 모였다. 나도 이웃의 도리로 찾아가 뗏장을 밟아주었다. 배 선생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를 보자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웃사촌을 들먹이며 막걸리로 새삼 반가움을 표시했다. 한 잔이 두잔 되고 점점 잔이 포개졌다. 


  묘사를 끝낸 박 씨 집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놓는 순간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배 선생이었다.

  “가는 길인디 함께 가유.”

  배 선생이 마당에서 가리는 사이에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고 나섰다. 두 사람은 우리 집 뒤를 돌아 나란히 박 씨네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삼사 분 거리였다. 배 선생이나 나나 낮술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 길로 박 씨 집안의 식구들과 어울려 끝내 소주가 한잔 껌뻑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끝날 무렵이었다. 배 선생은 박 씨네의 친지들과 잘 알고 지내는 반면 나는 초면이라 그다지 편치 않았다. 게다가 다음날 아침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였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쓸린 배 선생은 아직 멀었다. 내가 먼저 간다며 김을 뺄 수도 없었다. 조용히 자리를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단초였다.

  며칠 후 배 선생에게 다시 사과를 했다.

  “저 잘못입니더.”

  “아무리 친해두유. 잘못한 건 잘못 한 거유.”

  이웃사촌은 이웃사촌이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렸다. 밭에서 쇠막대기 하나 가져왔다가 혼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배 선생의 말씨는 깔끔했다. 그리고 꼿꼿했다.

  “............”

  “나라두 핼 이야긴 해야지유.”

  배 선생이 총대를 대신 멨다. 입빠른 소리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성격과 위상을 나에게 다시 각인시켰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배 선생의 지청구에 혼쭐난 여파는 오래갔다. 늘 긴장의 대상이어서 말끝에 자칫 오해로 번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어떨 땐 집사람이 옆구리를 찔렀다. 입 밖에 막 나오려는 농담 한마디를 도로 삼켰다.

  버갯속 영감이 그나마 농담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편이다.

  “도내에는 우째 갈매기가 없십니꺼?”

  영감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요긴 없슈. 앤맨(安眠)이나 안흥 쯤은 가야 본다니께.”

  “욕심 많은 덴 갈매기가 없다카데예.”

  “허긴, 욕심이 많아두 엄청 많슈.”

  버갯속 영감의 대답은 명쾌했다. 똑같은 질문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영감과 사뭇 달랐다. 여기와 저기는 다른 곳이었다. 한동안 귀는 열고 입은 닫아두기로 했다.


  “더 먹어. 더 먹어.”

  새우가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끌어다 놓았다. 조금 전에는 저만치 놓여있던 회 접시를 손수 들고 왔다. 버갯속 영감 당신은 먹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음식을 내 앞에 갖다놓는 바람에 옆 사람들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많이 먹어유. 대사집에선 많이 먹어야 복 받어.”

  동네 최 씨네 대삿날이었다. 저만치 앉아있던 버갯속 영감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영감은 내 맞은편에 비집고 앉았다. 내가 유일한 친구라 생각했는지 내가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 대한 배려는 틀림없었다. 

  잔치 집에 오래 눌러앉아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영감은 인사를 열심히 받았으나 어울릴만한 연배가 없었다. 나는 영감을 옆에 태우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대사 집에 가두 이젠 사람이 없슈.”

  “잔치 집에 사람이 왜 없습니꺼? 친구가 없지예.”

 

  집에 딸린 공사는 한결 느긋해졌다. 집 안팎에 마무리 할 일이 즐비하나 애써 숨을 골랐다. 종내 서둘러 될 일이 아니었다.

  세간도 일습이 갖추어졌다. 마당 가운데 장꽝(장독대)에는 큰 것, 작은 것, 중간 장독이 고루 자리를 잡았다. 태안 읍내 조석시장 어물전에서 쾌로 사온 코다리가 처마 밑 대나무 걸대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빨랫줄에는 짚으로 묶은 호박오가리, 무시래기가 지나가는 바람에 너울거렸다. 메주를 쑤어 장을 담갔다. 장맛이 좋다고 동네에 입소문이 났다.

  

  뒤로 난 창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여유도 생겼다. 당섬을 징검돌로 구도 항에 건너뛸 듯 다가왔다. 집 안으로 들어올 그림은 다 들어왔다. 보이지 않으나 왼쪽으로는 청산리 포구가 앉아 다소곳이 오른 편에는 팔봉산이 둘러서 우렁차다.

  -세어도 셀 만 한 배들이 섬과 섬 사이에 놀고 있다. 물이 날 때는 얼기설기 장풀(갯골)이 드러난다. 그러다 밀물이면 고즈넉한 호수가 달빛아래 한량없다.-

  보면 볼수록 그랬다.

  -저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그런 바다가 아니다. 어디선가 밀려온다. 찾아오고 돌아온다. 애당초 파도소리가 없다. 수평선도 없다. 하루에 두 번 물이 찬다. 해가 있으면 바다요 달이 뜨면 거울이다.-


  나는 오랜 만에 개펄로 내려갔다. 능젱이와 왕발이가 서로 뒤집어져 놀았다. 박하지도 어슬렁거렸다. 뻘물로 눈만 남은 망둥어 새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민물이 흐르는 갯골에 바다고동이 수북했다. 파놓은 숨구멍으로 이름 모를 생명들이 빼꼼 빼꼼 내다보거나 들락거리며 부산을 떨었다. 살아있었다. 저들끼리 분주했다. 개펄은 따뜻했다.

     

  나에게 한 가지 재주가 늘었다. 갯골을 보고 나는 물인지 드는 물인지 알게 되었다. 감나무 가지에 산비둘기와 물총새, 곤줄박이, 굴뚝새가 번갈아 날아들었다. 용상에 앉아 따르는 한잔 술도 멋이 들고 맛이 달랐다. 여차저차 여기까지 오니 어지간히 갓끈이 풀어지기는 풀어졌다.



                                                                                                                                         계속 연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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