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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1)척사대회

척사대회                                                                                                           (11회)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어민 회관에서 척사(擲柶)대회가 열렸다. 세시풍속으로 해내려온 마을잔치였다. 최근에 시들했다가 오래 만에 열리는 윷놀이라 사발통문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윷놀이를 언제 해봤는지 나는 까마득했다. 

  대회에 꼭 참가해 달라는 기별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우리 내외는 달력에다 크게 동그라미를 쳐두었다. 얼굴 내미는 값으로 찬조 상품을 몇 점 준비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오락가락하였다. 행사를 주관하는 문 반장은 애매한 날씨가 못마땅한 듯 회관 안팎을 들락거리며 계속 하늘을 살폈다. 자칫 바깥에서 비를 맞느니 회관 안이 낫다는 결단을 내리고 주민들을 일찌감치 몰아넣었다. 원래 널따란 마당에 차일을 두엇 친 다음 멍석을 깔고 벌여야 제 맛이 났다.

  회관 입구에는 소주와 맥주가 상자 째로 쌓여있어 오늘의 초점이 어디 있는지 알만했다. 주방에선 아낙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 희희낙락 하며 음식을 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회관 안에서는 먼저 온 남정네들이 둘러앉아 대진 운과 승부를 점치며 하루를 즐길 준비에 들어갔다.

  정면 탁자위에 푸짐하게 진열된 상품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부부 또는 두 사람을 한조로 스무네 팀의 빈 대진표가 벽 한 가운데 커다랗게 나붙었다. 널따란 방바닥에는 돗자리기 깔렸다. 띄엄띄엄 말판 다섯에 윷이 한모 씩 얌전히 놓여 있었다. 쌀부대를 펴서 자유분방하게 그린 말판이 시골스러웠다. 상수리나무로 만든 윷은 거칠어보였지만 듬직했다. 갓 깎아 만든 윷이라 생기한 나무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점차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추첨으로 대진이 짜여가자 그때마다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예선 준결승 그리고 패자부활전까지 있어 승부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달아올랐다.

  “어이쿠, 한사리해야지유, 지게 생겼슈.”

  “엎퍼서 가유.”

  승패가 드러나면서 기대와 허탈이 엇갈렸다. 집사람과 한 조인 나는 첫 판에는 겨우 턱걸이를 했으나 두 번째 판에서 졌다.

  예선전을 마치자 윷판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일찌감치 희망이 없어진 팀은 입이 텁텁했는지 참다못해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먹는 거이 남는 거유. 한잔 허구 합시다유.”

  “너벅지 없슈. 탁배기라도 좀 내노으슈.”

  기다렸다는 듯이 문 반장 아주머니가 화답을 했다. 막걸리는 없었고 아침부터 소주였다. 한 차례 술상이 물러나자 준준결승이 시작되었다. 탈락하는 팀들은 다른 팀의 응원에 가세했다. 결승에 가까이 갈수록 함성은 커지고 탄식은 높아갔다. 어느새 주객이 바뀌어 동네 윷이 되어버렸다. 윷을 놓는 당사자들이 뒷전으로 밀리고 목청 큰 훈수꾼이 아예 말꾼자리를 꿰차고 앉아 기세등등했다. 

  “어허, 사짜여. 잡어. 잡어버리라니께.”

  “포개서 가유.”

  “돼아지 나와라. 어이쿠.”

  “시끄러유. 자그매 떠들어유.”

  훈수인지 응원인지 뒤범벅이 된 회관은 시골 잔치마당 그대로였다.


  그때 회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눈 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버갯속 영감이었다. 나는 먼발치서 영감을 알아보았다.

  “지나다 들렀네. 웬 차들이 잔뜩 있길래...”

  내가 다가가자 영감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꼬질꼬질한 차림새로 보아 지나가다 무심코 들어온 것 같았다.

  “허허, 정신들 없구머.”

  영감은 뒷짐을 한 채 목을 널어 뜨려 두어 곳 윷판을 훔쳐보았다.

  “잘들 노네그려. 윷판이 지대로 벌어졌구머.”

  윷을 던질 때 마다 여기저기 합창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에 묻혀 영감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들 윷판에 혼을 놓고 있었다. 회관 안에는 버갯속 영감과 나 둘 뿐인 것 같았다. 마침 창가에 빈 의자가 있어 내가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영감은 앉을 생각이 없었다.

  “허허, 가야겄서.”

  “선걸음에 가실라고예?”

  “가서 헐 일이 있슈.”

  “아니, 그래도예.”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버갯속 영감은 살금살금 발길을 돌렸다. 현관에는 수십 켤레의 신발이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한참 당신의 신발을 찾았다. 흙투성이에다 너덜너덜한 운동화 두 쪽을 끌어당겼다. 영감은 문지방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영감의 좁다란 어깨는 쳐질 대로 쳐져있었다. 버갯속 영감이 왔다가 돌아가는 데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

  마당까지 따라 나갔으나 영감은 말이 없었다. 배웅하는 나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회관 앞마당을 가로질러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갔다. 금방 진눈깨비가 뿌리려는지 하늘은 음산했다. 구부정한 허리에 두 손은 가지런히 뒷짐을 졌다. ‘모야.’, ‘도야.’ 회관 안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버갯속 영감의 등 뒤에 따갑게 내려앉았다. 제각이 있는 팽나무 아래 언덕배기를 돌자 영감은 사라졌다.


  ‘이런 날 왜 좌장이 되지 못하실 가?’

  나는 회관 마당에 혼자 서서 어도(漁島)를 잇는 간사지를 바라보았다. 가을이면 황금 들판을 이룰 원논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무랄 데 없는 문전옥답이었다. 어송으로 뻗은 저수지도 오늘따라 더없이 길었다.

  버갯속 영감의 공적비는 마을 회관 앞에 서있다. 공적을 누군가가 이렇게 힘주어 적었다.


  ‘28년간 이장으로 근속하면서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지역사회 발전과 주민생활 향상을 위해 한 몸 바친 공적을 필설로 표현할 수 없으나...

  도내 어은 간 매립공사를 3년에 걸쳐 완공하는데 주역이...

  그리하여 기초마을 자립마을을 거쳐 승자마을로 이제는 부자마을로 이끌었다.’


  “도내(島內) 말이여... 손바닥만한 땅, 맨 날 파봐야 뭐가 나오남. 다들 새끼들은 많구.”

  언젠가 영감이 했던 말이 새삼 되살아났다.

  “허허, 가야겄어.”

  힘없이 내뱉은 영감의 한 마디가 진눈깨비에 휘몰려 솟구치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윷판에 몰두하는 사이에 서둘러 가서 해야 할 일이 뭘 가.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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