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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9)악우

악우(惡友)                                                                                                      (9회)

  

  “나, 얼릉 가야 헌다니께...”

  버갯속 영감이 숨 가쁘게 말했다. 선걸음에 갈 참이었다. 손에는 달랑 호미 한 자루를 들었다.

  “오늘 말이여. 지슴매야 허거덩...”

  영감은 어딘가 김매러 가는 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할 일부터 챙기는 영감을 나는 멀건이 쳐다보았다. 왠지 영감은 힘이 없어보였다.

  “근디 허리가 아퍼 죽겄서...”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픈 허리를 들먹였다. 영감은 눈을 찡끗하며 허리를 서너 번 비비꼬았다. 마치 철부지들이 재롱을 떠는 것 같았다.

  “어이구, 어서 가야혀. 진즉 아시 매야허는디...”

  “그래두 그렇치예. 물이라도 한 모굼 하고 가시야지예.”

  나는 은근슬쩍 영감을 평석 쪽으로 밀어갔다. 영감은 못 이긴 척 엉거주춤 아장걸음으로 따라왔다.

  “허허, 요기 앉으라구.”

  “.............”

  “허허, 이 사람이 오늘, 나, 일 못허게 허네그려.”

  “커피 드릴까예?”

  “시방 먹고 나왔다니께. 물 자꾸 먹으무 일 못혀. 오줌 매려워서 말이여.”

  한사코 사양했다.

  “그래두유... 워째 선걸음에 가남유.”

  나는 느릿느릿 충청도 말씨로 대꾸했다.

  “허허, 오늘 풀 안 매머 말이여... 나 혼나. 그제 비 오고 나서 이내 매서야 했는디.”

  영감은 호미를 흔들며 처지를 설명했다. 나는 웃음이 났다.

  “아니, 누가 혼을 낸단 말입니꺼?”

  “허허, 뉘긴 뉘여. 할망구지.”

  “숙제 안 했다고예?”

  “그려, 도리 없슈.”

  “가마이 있십니꺼?”

  “워쩔거여.”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지예?”

  “나, 말 잘 들어.”

  “우짭니꺼. 그럼 당장 가시야지예.”

  “뭐라구? 있따 가라구? 어이구.”

  영감은 능청을 떨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 때 마침 영감에게 물어볼 과제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영감의 소매를 이끌고 소사나무 화분 곁으로 갔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영감은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걸음걸이로 보아 영감도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처음에 침울해 보였던 얼굴이 잠간 사이에 화기를 되찾았다.

  소사나무는 태안에서 특별히 보호하는 나무이다. 영감이 분재로 기르던 세 개중에 하나를 몇 달 전에 나에게 주었다. 이놈이 사들사들하다 이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다. 말라죽었는지 살아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준 대나무 분재와 관상용 난쟁이 고추 두 그루는 잘 자라고 있었다.

  “이러 큼 빼작빼작 혀서 되겄서. 허허, 요거 봐.”

  영감은 화분에 담긴 흙을 손으로 훑었다.

  “물을 지 때 안 줬구마. 쯔쯔쯔.”

  나는 긴장했다. 영감의 성의에 보답은커녕 나무를 죽여 버렸다면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영감은 소사나무 잔가지와 말라붙은 잎 새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진단을 내렸다.

  “근디... 죽지는 않겠슈.”

  영감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마침 손에 들고 있던 호미로 나무 등걸 주위를 흙을 콕콕 찍어 부드럽게 해주었다.

  “어이구, 요기 와서 고생허누머. 쯔쯔.”

  영감은 소사나무 가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뜨끔했다. 마치 친정아버지가 시집 간 딸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요놈은 말이여... 물을 매일 주야혀.”

  변명을 하자면 도내에 가끔 내려오는 나에게 잡다한 일거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하다 보니 화분에 물주기도 때를 걸렀다.

  “사람도 물 안 먹으머 죽지. 안그려?”

  소사나무가 듣기나 하듯 영감은 크게 말했다.

  “물 좀 주어. 어이구.”

  나는 소사나무 앞에서 꼼짝없이 야단을 맞았다. 그러나 살아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영감은 몇 걸음 건너 대나무 화분으로 손길을 돌렸다. 손바닥으로 정성스럽게 대나무 이파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대나문 인제사 자리를 잡았네.”

  봄에 죽순까지 올라온 대나무의 자태가 대견했는지 영감은 얼굴을 활짝 폈다. 주위의 잡초를 슬쩍 걷어내고 굵은 모래흙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찔러보았다.

  “요쯤에서 거름을 쬐끔 주는 기 좋은디... 요담에 올 때 내 갖다줌세잉.”

  대나무는 옮겨심기가 어렵다느니, 첫해에는 잎사귀에 점박이가 생기지만 나중에 저절로 없어진다느니, 알맞은 크기로 미리 잘라주어야 죽순이 튼튼하게 돋아난다는 등 대나무 재배에 대한 즉석 특강이 이어졌다.

  “어이구. 나, 허리가 아퍼 죽겄서.”

  영감은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며 말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다가 몇 번 굽혔다 폈다. 아픈 생각이 나면 아프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아프지 않았다. 희한한 병이었다.

  허리가 아파 죽겠다는 말이 입에 달렸다. 오늘 벌써 세 번째였다. 횟수가 많을수록 어서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큰 게 분명했다. 선걸음에 바로 갈듯이 서두르던 영감이었다. 영감은 슬금슬금 평석으로 다시 돌아와 손에 든 호미를 밀쳐놓으며 엉덩이를 걸쳤다. 김 맬 일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이, 발써 왔네. 저 할망구가...”

  영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예?”

  동시에 영감은 벌떡 일어섰다. 비쭉이 턱을 들어 서쪽 언덕배기를 가리켰다. 버갯속 영감의 할멈이었다. 할멈이 땅에다 머리를 박고 열심히 김을 매고 있었다.

  “이잉?”

  “놀라긴예?”

  “허, 언제 왔다나?”

  “할머이 냄새는 잘 맡내예?”

  “아녀. 내, 흔녁히 갔다옴쎄.”

  영감은 허리춤을 걷어 올리며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

  “넉잡아 두어 시간이머... 어이 객단내구 올텐게잉.”

  “............”

  순식간의 일이었다.

  “난 고추밭이구. 조기 조, 할망구는 오늘 양파 밭이여... 허허.”

  영감은 호미를 찾아들고서 슬금슬금 마당을 나섰다. 할망구에다 한껏 힘을 주는 걸 보니 응어리가 덕지덕지 배였다. 아무래도 간밤에 무슨 곡절이 있었다. 

  “아이고, 바가지를 끌키도 된통으로 끌킸네예.”

  등 뒤로 놀려댔으나 영감은 못들은 척 했다.

  “허여간 오늘 안 돼. 얼릉 가야혀.”

  영감은 갈 길을 서둘렀다.

  “나이 들모 바가지가 보약이라 카더니. 우리 영감님, 할멈 때메 철 들겄십니더. 아이고...”

  영감의 발걸음은 어느새 저만치 가고 있었다. 스스로 그은 선에서 오락가락하던 버갯속 영감이 안쓰러웠다. 호미를 든 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영감의 뒷모습에 쓴웃음이 났다. 그야말로 군기가 바짝 들었다. 일찌감치 와서 조용히 시위를 하는 할멈에게 버갯속 영감인들 당할 재간이 없으렸다.

  그럴수록 내가 영감의 발목을 잡는 나쁜 친구가 되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를 일이었다. 할멈이 시위에 나설 정도면 나는 할멈의 눈 밖에 나도 한참 났다.

  ‘누가 뭐락캐도 세상만사 문리는 악우(惡友)가 틔어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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