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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7)인연

 인연                                                                                         (7회)

 

  반년이 지난 시월에 일단 준공을 했다. 우선 집 안에 이부자리를 펴고 잘만 하게 되었다. 태안읍 사무소에서 우편으로 준공 승낙서가 날아왔다. 군청에 들러 공과금을 낸 다음 등기소에 등기를 마쳤다. 세금을 내며 이처럼 기분 좋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맨 먼저 ‘용상(龍床)’을 거실로 들여왔다. 용상은 상량문을 쓰는 날 연습을 해 본 ‘龍’자가 쓰인 나무토막으로 나는 우스개삼아 용상이라 이름을 붙였다. 공사 기간 내내 자칫 없어질까 봐 혼자 신경을 썼었다. 가로 세로 한 자가량으로 높이도 적당해 내 전용 식탁 의자가 되었다. 용상에 앉아 바다를 내다보니 꿈결이었다.

  춘 삼월 착공이 엊그제 같았다. 돌이켜보니 쓴웃음부터 나는 대목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시골 생활의 꿈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가다 스치는 농가주택이나 농촌 풍경이 오래 동안 잔영으로 남았다. 소박한 소망이 어떤 시점이 가까워 올수록 간절해졌다.

  집 사람이나 나나 선조들이 남기고 간 얼마간의 자금이 불씨가 되었다. 고심하던 끝에 두어해 전에 땅을 사두었다. 바로 이곳 도내리 칠백 평이었다. 

  땅을 염두에 두니 집이 어른거렸다. 관련된 책도 보고 이런저런 소리들이 귀에 들어왔다. 별의별 건축 박람회라는 박람회는 다 쫓아 다녔다.

  서산의 고북(高北)에서 나오는 황토벽돌이 좋다는 말도 들렸다. 그 황토벽돌로 지은 집들을 찾아 현장 답사를 했다. 서산 갈마리(渴馬里)에 있는 김 사장 댁은 너무 자주 찾아가 미안스러웠다.

  처음에 나는 빨간 벽돌집을 생각했다. 좀 색다르게 지어보자는 집사람의 주장에 밀려 흙집으로 결론이 났다. 허름한 농가주택에서 출발한 꿈이 황토집을 짓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저렇게 집 도면을 그려보았다. 아무래도 단순한 게 좋았다. 뜸이 돌았다 싶으니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해가 바뀌어 해동하면 착수하자고 집사람을 찔렀다. 입춘에 벌써 봄바람이 일었다.

  땅이 임야이므로 대체조림비와 전용부담금을 납부하고 산림 형질변경 허가를 받았다. 경계 측량을 하면서 백 평의 대지가 마련되었다.

  지관(地官)을 불러 방위를 보고 물 나는 곳은 없는지 알아보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백화산 주봉을 비키고 대문은 동으로 내라는 말을 했다. 사사 떠는 게 그렇긴 했으나 재미삼아 해본 일이었다.

  앞쪽에는 포강으로 내려가는 자그마한 계곡이 있다. 집터를 살 때 떡갈나무나 굴참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너무 울창하여 사이에 있는 논이 안보일 정도였다. 숲 너머로 간사지 논이 내려다보이고 뒤는 바다여서 마파람을 걸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집을 착공하기 직전에 들렀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느 날 그 나무들이 모두 잘려버렸다. 앙상한 그루터기에다 잔가지가 이리저리 뒹굴어 볼썽사나웠다. 구멍이 뚫린 듯 전망이 휑했다. 

  이웃집 아저씨를 찾아가 물어보았다.

  “그늘이 진다고 친 모양인디... 글시. 나중에 알게 될테지유.”

  끝내 말끝을 흐렸다.

  

  삼월 중순이었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켰다. 아침 햇살이 퍼지자 겨우내 얼었던 땅에서 무럭무럭 김이 올랐다. 간단하게 고사를 지낸 다음 포클레인의 시동을 걸었다. 들뜬 마음에 천지신명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닷가 바람은 사나웠다. 마파람과 뒤바람을 번갈아 타며 비가 들칠 때는 혼을 빼놓았다. 여기 사람들은 큰물이 진 적이 없고 태풍도 비껴가는 곳이라 말했다. 그 동안 내가 만난 비바람은 약과라니 앞일이 저어되었다.

  아니나 다를 가 폭우에 벽돌이 무너졌다는 옆 집 아저씨의 전화를 받았다. 황토 벽돌이라 비바람과 상극이었다. 급히 차를 몰아 현장으로 내려올 때는 정신이 아득했다. 비를 막는답시고 두꺼운 비닐을 덮은 게 잘못이었다. 비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비닐에 휩쓸려 갓 쌓은 벽돌이 내려앉았다. 대비가 너무 철저했던 게 문제였다. 벽돌을 다시 쌓고 인방을 갈아 끼웠다. 

  이래저래 예산을 초과하고 일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시행착오라 해야 할지 두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무모한 첫 경험이었다. 다행히 그때그때 빨리 판단을 해서 잘 대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초를 하는 과정에 단안을 내려 추가로 한 오가작업은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었다.

  당초 계획과 달리 내가 직접 시공을 했다. 처음에는 주택전문 업자에게 도급을 주었다가 곧 생각을 바꿨다. 애당초 파일을 박은 다음 기초를 했으면 오가작업은 필요가 없었다. 철근도 노란 색이 아닌 초록색을 가져왔다. 황토 벽돌집에 대해 경험과 지식이 모자랐다. 들은풍월을 짜깁기해 내가 가르쳐야 할 형편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공사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자기들 일정에 쫓겨 서두르다보니 시공 품질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당초 내가 생각해둔 세세한 부분들이 묵살당하기 일쑤여서 누가 집 주인인지 분간이 안갈 지경이었다.

  “우린 살 사람이요, 당신들은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나대로 참을 인(忍)자를 되새겼으나 이내 한계가 노출되었다.

  ‘그려’라는 한 마디가 혼란의 발단이었다. 나의 희망 사항을 이야기하면 인부들은 ‘그려’하고 쉽게 대답을 했다. 나는 ‘예스’로 알아들었다. ‘노’에 가까운 부정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저 ‘알았다’는 상투적인 말대답이었다.

  “시골 살려면 제발 성질 좀... 이 좋은데 와서...”

  집사람이 이따금 나를 진정시켰다. 그러면 나는 못이긴 척 슬며시 현장을 벗어났다. 업자들의 불뚝 고집 앞에 매번 다투기도 피곤했다.


  공사기간 내내 사우나 수면실에서 새우잠을 꽤나 잤다. 서산에서 안면도(安眠島)나 만리포(萬里浦)로 가는 길목이라 늘 북새통이었다. 어느 날 밤에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중학교 다니는 한 녀석이 훔쳐갔다. 추적해 며칠 만에 되찾았다. 그 사이에 음악을 다운 받거나 게임을 해서 이십 여만 원의 부담을 나에게 안겼다.

  서울의 아파트 상가에 있는 김밥 아줌마 매상도 적잖이 올려주었다. 시간을 아끼느라 차 중에서 때운 김밥이 몇 줄이나 되는지 짐작이 안 갔다.

  지붕의 기와 공사 대금이 든 가방을 휴게소에다 두고 왔다가 허겁지겁 찾으러 가기도 했다. 이처럼 어처구니가 없었던 일들이 더러 있었다.


  염려한대로 정화조 관 매설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집 아래로 논과 포강을 지나 관로 길이가 일백 미터가 넘었다. 논 주인의 요구가 복잡해 재공사를 되풀이 했다. 손바닥만한 논이었다. 간사지가 생긴 후 수 십년동안 놀리고 있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나온 논 주인의 양해가 그나마 고마울 따름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붙일 때는 얼마나 쌀쌀 맞았는지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 양반이 지금 친하게 지내는 박 종식 씨였다.

 

  “허허, 이럼 되간유?”

  옆집 아저씨였다. 이웃 밭둑에서 쇠 파이프 하나를 자재 고임대로 주워다 쓴 게 화근이었다. 며칠 뒤에 우연찮게 시비를 걸어왔다.

  “예? 굴러 다니길래...”

  “굴러 다니다니유?”

  “.............”

  “시굴에 굴러다니는 게 어딨슈?”

  “죄송합니더.”

  “말을 그럭허먼 안되쥬...”

  “잘못 됐습니더... 미리 말씀을 드려야하는데...”

  나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조근 조근 마치 타이르듯 따지는 말투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젠 이웃사촌이 되었다. 

 

  태안 마애삼존불(泰安 磨崖三尊佛)의 인연도 생생하다. 내내 찜찜했던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준공 신청을 코앞에 두니 이런저런 고민이 현실로 닥아 왔다.

  대지가 경사가 진 곳이다 보니 자연히 동편 모서리 생땅에 바짝 붙여서 집을 앉히게 되었다. 옆집 땅을 침범한 건 아니나 ‘처마 끝이 반 미터 이상을 이격하여야 한다.’는 법 조항이 늘 맘에 걸렸다. 준공에 대비해 이웃한 땅 임자의 동의서를 받아두기로 했다.

  땅 소유자는 두 사람 공동명의인 데다 이곳 현지인이 아니었다. 수소문을 해서 인천이나 양재동으로 여러 번 찾아가 설득을 했다. 떨떠름해 하는 당사자들 표정이 내 뒷등을 끌어당겼다. 동의서 양식을 보냈으나 추석이 가깝도록 무소식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소슬바람이 일었다. 조바심이 났다. 독촉 전화도 한 두 번이지 도리 없이 상대방의 선처만 기다렸다.

  어느 날 태안 읍내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백화산(白華山) 길로 차를 몰았다. 그동안 입구를 수없이 지나다녀 마애삼존불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산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애삼존불 앞으로 ‘일소계(一笑溪)’가 흐르고 ‘태을동천(太乙洞天)’이 새겨진 바위가 우람했다. 감모대(感慕臺)에 걸터앉아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태안의 젊은 향토사학자가 쓴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라는 책자였다. 며칠 전에 국보 307호로 지정이 된 걸 기념하여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동의서를 보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태을(太乙)의 기운인가 마애삼존불 영험일가.


  그러나 저러나 어려운 고비는 안에 있었다. 자질구레하게 집 사람과 견해차가 많았다. 한마디로 내가졌다. 그게 편했다. 황토 벽돌집이 되고 이십 평에서 삼심 평, 기와집이 된 것도 모두 집 사람의 주장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집은 집사람과 공동작품이라는데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집 짓는 거이 쉬운 기 아녀.”

  버갯속 영감이 말했다.

  “쪼끔 숨이 가뿌네예.”

  내 심정 그대로였다.

  “요기다 집 지을 생각은 워쩌 한기여?”

  “바다가 보이고, 들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예.”

  “허긴 그려. 자린 괜찮여.”

  “그럴 듯 하지예.”

  이 자리에다 집지을 엄두를 낼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축대를 쌓을 돌을 덕산 인근의 채석장에서 수십 대분을 실어 날랐다. 흙도 몇 차례에 걸쳐 인근 상옥이나 어은에서 거의 백 대 분을 갖다 부었다.  

  “일꾼들은 서울서 데려온겨?”

  “전부 서산, 태안 사람들이라예.”

  “잘 혔네그려. 물정을 아는 사람이 나을 거여.”

  “아무래도...”

  “그려. 알끼여. 시(세)번째로 짓는 집이 저그 집이여.”

  흔히 하는 말이었다. 버갯속 영감도 꺼냈다.

  “두 번 다시는 못하겠십니더.”

  “아랫도리 힘이 있어야 하는 거여. 집, 기냥 되는 기 아니여.”

  영감은 정곡을 찔렀다.

  “모릉께네 덤벼든 거지예.”

  한 번 더 짓는다면 앞뒤 재가며 정말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허허, 워찌 요기루 오기된 기여?”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영감이 또 물었다.  

  “영감님 만날라꼬 온 거 갑십니더.”

  나는 영감 얼굴 쳐다보며 농쳤다.  

  “날 만날라구? 허허.”

  영감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예.”

  “요기 오기가 쉬운 데는 아녀.”

  영감은 느릿하게 말했다. 영감 말이 맞긴 맞았다. 이곳까지 악착스레 집 지으러 올 곳은 아니었다. 세월 좋아 사통팔달 뚫린 도로 덕분이었다.

 

  막연히 서해안 쪽 어딘가 하는 정도였다. 어느 날 경제신문을 보다가 부동산 정보 기사 한 줄이 단초였다. 어느 주말 아침에 집사람과 바람도 쐴 겸 집을 나섰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붐볐으나 서해대교는 시원했다. 태안 읍내 복덕방의 안내에 따라 삭선(朔善), 몽대(夢垈), 연포(戀浦) 인근을 둘러보았다. 한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도리 없이 어느 포구에서 늦은 점심이나 먹고 서울로 돌아올 참이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복덕방 사람의 마지막으로 한 군데를 권유했다. 마침 서울로 오는 길목이라 나는 별 생각없이 따라 왔다.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던 바다가 보이고 들이 보였다. 산이 있고 개펄이 있었다.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끝을 스쳤다. 이곳 도내나루터였다.

  “글시, 임자가 따로 있슈.”

  복덕방 사람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왠지 그 소리가 내 귀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쩌면 자동차 바퀴 구르는 대로 들어온 곳이었다.


  해가 바뀌기 전에 서둘렀다. 망년회 삼아 섣달 그믐날 주민들을 청해 집들이를 했다. 남녀노소 삼십 여명이 거실에 북적거렸다. 옆 집 배 선생은 ‘청춘을 돌려다오’를 목청껏 불렀고 배 아주머니의 니나노 장단이 힘찼다. 숟가락으로 두드리는 바람에 오래된 나무 팔각상이 순식간에 찍히고 파였다.

  집들이 흔적을 팔각상에 아로새기고 갑자년은 저물었다. 어쨌거나 왁자지껄 한바탕 해야 할 일을 하고나니 을유년(乙酉年) 새해아침이 가벼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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