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4)고추밭

고추밭                                                                                                  (4회)

 

 

  버갯속 영감은 오다가다 어수선한 공사판을 가끔 들렀다. 만나면 만날수록 영감이 할 이야기도 내가 들을 이야기도 많았다. 나를 놀라게 한 건 무엇보다 영감의 기억력이었다.

  “관행(관향)이 어디라구?”

  “예, 김영(金寧)입니더.”

  “허, 나는 김핼(金海)세그려.”

  “들었습니더. 얼마 전에...”

  “근디 태안 읍내 가머 말이여. 삼성상회라고 있시유. 농기구 파는 가간 (가게)디 그 집이 김영이유.”

  며칠 전에 호미, 삽, 곡괭이 등 몇 가지를 그 가게에서 샀다. 시골 가게란 뻔해 그 집이 그 집이었다.

  “김영이 바로 김해여... 본디 김 씨는 하난디, 김해 김 씨를 선김(先金)이라 허구 김영 김 씨를 후김(後金)이라 했슈.”  

  버갯속 영감은 조용히 김영 김 씨의 내력을 짚어갔다.

  “파가 많은디... 충의공파구머.”

  중시조가 누구인데 무슨 벼슬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보다 더 잘 알았다. 나의 항렬을 따져보더니 귀한 집 자손이라며 족집게로 집듯이 집었다.

  “허허, 조오기 사는 내 제매 오머니 쪽이 김영이유.”

  “반갑네예.”

  “김영샘이두 김영이여. 허여간 인물이 많어.”

  나의 고향이 진주(晉州)라고 하자 영감의 입에서 촉석루(矗石樓)가 등장했다.

  “허허. 내 두어 번 진주에 간적이 있슈. 남강(南江)도 보았슈. 백사장이 좋던디 담에 가보니 없데... 거참.”

  의암(義岩) 바위에서 논개(論介) 이야기로 넘어갔다. 엊그제 다녀오기라도 한 듯이 진주에 얽힌 사연을 연줄연줄 풀어놓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삼장사(三壯士) 세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해 냈다.

  “이성계 말이여... 현비 고향이 진주라네. 그 땜에 진주가 얼매간 진양(晉陽)이라 불렸시유.”

  내가 들어보지 못한 야사도 영감은 거침이 없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 정도에서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태안엔 가(賈)씨가 많은 가 봐예. 몽산폰(夢山浦)가 어디에 사당이 있데예.”

  “바로 양잼리(兩潛里)여...”

  “요기 가 씨가 소주(蘇州) 가 씨여. 시조가 중국서 넘어 왔시유. 가 유약(賈維鑰) 장군인디... 임진란 때 명나라 이 여송 장군과 함께 조선에 와서 싸웠시유. 중국 소주에서 배를 타고선 도착한 곳이 태안 앞바다에 있는 가의도(賈誼島)런 섬이여...”

  “정유재란 때는 가 유약 장군이 아들, 손자까지 데리구 조선에 들어 왔는디...”

  내 표정을 읽는 버갯속 영감은 갈수록 진지했다. 영감은 한 대목이라도 빠뜨릴 새라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이 손자 되는 가 침(賈琛)이 말이여... 부산(釜山) 전투에서 죽은 제 할아부지와 아부지 신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시유. 그루거서는 산소를 지키겠다고 조선 땅에 남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슈.”

  “두 번이나 남의 나라에 와서... 그것도 삼대가... 드문 일이네예.”

  “근디, 철종 때 와서 사우와 정문을 하사 받았시유. 냄면 양잼리에 있는 사당이 바로 그거라니께.”

  “조정에서 와 그리 늦게 내렸을까예?”

  “가 침이 말이여. 일본 쪽으룬 보구 앉지도 안했더구마. 허허... 자식 넷을 두었는디 생활이 말이 아니었던가베.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향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려구 태안까지 왔다가... 그 때가 명(明)에서 청(淸)으루 넘어가는 때라 포기허구 태안에 눌러앉은 거유.” 

  이제야 내려다보이는 역사의 뒤안길이 여기도 있었다. 남의 나라를 찾아와 우리의 고국산천을 지켜준 은인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진정 보듬지 못했을 가. 왜 잊고 살았을 까. 언젠가 시간을 내어 공부할 가치가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던데요.”

  내가 아는 가 씨 한 분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러자 버갯속 영감은 일가붙이나 되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허허, 그 사람, 워떻게 알어? 상옥(上玉)사람이유.”

  “여기서 가깝네예.”

  “바로 요 너머여. 북창서 죄끔 가면 말이여... 허허, 근디 이상허대. 가 씨들이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드물어.”


  인근의 안흥이 한때 안흥진(安興鎭)이라 불리었다. 태안반도가 안흥진성을 축조할 만큼 서해바다로 돌출한 천연요충지였다. 한반도의 중간인데다 중국과 가깝다보니 자연히 내륙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의 관문이자 전진기지가 되었다. 

  “거봐.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도 요기를 모다 거쳐 간 거여. 왜(倭)는 말 할 것도 없구.”

  영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백제시대에 조성된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 일찍이 이곳 태안과 서산에 있게 된 연유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태안의 옛 이름은 마한 때는 고랍국(古臘國), 백제 때는 성대혜현(省大兮縣), 통일 신라 땐 소태현(蘇泰縣)이었다. 지금의 태안은 고려 때부터다. 말 그대로 태평하고 안락하다는 뜻이어서 삼척동자도 알 만하다. 이후 칠백 년 동안 변함없이 불리 고 있는 태안이라는 지명에 태안 사람들은 자부심이 크다.

  버갯속 영감의 강의는 막힘이 없이 청산유수로 흘러갔다. 영감이 연출하는 충청도 역사 다큐멘터리는 흥미진진했다. 영감이나 나나 유월의 뙤약볕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들어와 찰랑찰랑하던 밀물이 어느새 빠져나가 갯골이 실지렁이처럼 어지럽게 드러나 있었다.

  태안 어디 어디에 제주 고(高) 씨가 많고 남평 문(文) 씨 자손이 무얼 하고 있다는 둥 여러 성씨들의 어제와 오늘을 염주알 굴리듯 꿰었다. 집단 성씨의 유래는 이곳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그저 그만이었다. 듣고 보니 많은 성씨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태안에 정착하게 된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태(泰), 안(安) 인가봐예?”

  뒤늦게 무언가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나는 영감을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일찌감치 태안의 지정학적인 운명을 간파한 걸가. 아니면 후손들의 앞날을 예견한 걸가. 우리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새삼 놀라웠다.  

  “허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헐게. 양잼리 가 씨 말이여.”

  영감은 양념을 치듯이 흥미를 유발시켰다.

  “가 씨들 옆 동네엔 경주 최(崔) 씨들이 많이 사는디, 가 씨 동네는 왕대가 많어서 바구리를 맨들어 팔구, 최 씨 동넨 쫄대가 많어 쪼랭이를 맨들어 팔었슈. 그래서 가 씨는 가 바구리, 최 씨는 최 쪼랭이라 불러유.”

  “재미 있네예. 영감님, 우찌 다 그걸 그러큼 기억하십니꺼?”

  “허허... 나 말이여... 소싯적부터 한번 들은 건 까먹질 않는다니께.”

  “저두 꽤나 기억력이 좋았는데... 발 벗고도 못 따라 가겠십니더.”

  “허허, 그런디 인저 틀렸시유.”

 

  버갯속 영감의 강의가 시작되면 나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언제, 어떤 주제가 등장할지 버갯속 영감이나 나나 모르는 일이었다. 강의 도중에 가벼운 질문을 하거나 무릎을 쳐주는 등 추임새만 넣어주면 화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 내외는 공사 일정에 맞추어 도내에 내려왔다. 사 나흘 만이든 한주일  만이든 한번 왔다하면 시간을 다투어 할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원래 우리 공사판이란 인부들과 벌이는 입씨름에 날이 새고 날이 저물었다.

  이런 공사판을 제쳐두고 버갯속 영감과 앉아있노라면 때론 궁둥이가 쑤셨다. 인부들이 이곳저곳 왔다 갔다 부산하면 안절부절 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허리끈을 풀었다. 힘을 빼고 느긋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상살이는 빨리 가도 늦게 가도 가서 보면 얼마 상간이 아니었다.

  영감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내 얼굴을 봐가며 이야기의 길이와 속도를 기막히게 조절했다.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영감은 크게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 오로지 타고난 성품에다 삼십 년이나 되는 이장의 연륜이 오늘의 버갯속 영감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허, 나 인저 가야 혀.”

  버갯속 영감이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영감이 깔고 앉아있던 벽돌 두어 장이 버그러져 떨어졌다. 영감의 발등에 떨어질 뻔해 순간적으로 나는 혼비백산했다. 노는데 잡쳐서 혼나는 데 이력이 난 개구쟁이가 어쩌다 정신이 번쩍 들 때와 다름없었다.

  “고추 잔가질 꺾어야 하는디 말이여.”

  “제가 쪼끔 도와드릴까예.”

  꼬리가 생기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뭐라구?”

  “한번 해 보입시더. 고추가질 우짜는지 궁금하거든예.”

  내가 새삼 잡치자 영감은 어리둥절해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양손을 들어 같이 가자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영감은 환하게 웃었다.

  “허허, 그려그려. 혀봐야 헌다니께.”

  “빨리 가입시더.”

  “허허, 그러무 고맙지. 공부도 허구.”

  나는 위 뚜껑이 달아난 보리때 모자를 질끈 눌러 썼다. 조적을 했던 친구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하얀 뭉게구름을 인 팔봉산이 버갯속 영감과 내 가슴에 그대로 안겼다. 영감과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감의 고추밭으로 향했다.

                                                                                                                      5회에서 계속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촌일기- (6)입장료  (0) 2008.08.27
귀촌일기- (5)반상회  (0) 2008.08.27
귀촌일기- (3) 상량  (0) 2008.08.05
귀촌일기- (2) 공적비  (0) 2008.07.19
귀촌일기- 버갯속 영감 (1) 어느날  (0) 2008.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