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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버갯속 영감 (1) 어느날

 

어느날                                                                                                                          (1 회)

 

  나는 그 노인을 버갯속 영감이라 부른다. 그 영감을 처음 만난 얼마 후 어느날이었다.

  “어이구, 허리야.”

  영감은 허리를 비틀면서 무언가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약쑥이었다.

  하얀 쌀자루 부대에 노끈으로 묶은 모양새가 정갈했다. 주위는 쑥 냄새가 번져났다.

  “나, 오늘 약쑥 쬐끔 가져왔슈.”

  “이걸 제게...”

  “안쩍 덜 말렀으니께... 그늘에 더 말리라구. 그랬다가 말이여...”

  영감은 쑥 이파리 하나를 떼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요걸 뻐갯속에 넣어머. 머리도 맑구... 잠이 잘 온다니께.”

  ‘뻐갯속’이라는 충청도 사투리가  나에게는 별나게 들렸다. 그 때부터 나는 그 노인을 ‘버갯속 영감’이라 불렀다.

  차츰 내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버갯속 영감’은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이젠 ‘버갯속 영감’하면 다 알았다.

  몇 십년동안 불리어 온 ‘이장(里長) 영감’ 자리를 ‘버갯속 영감’이 차지하게 되었다.


  영감은 일흔 여섯이다. 나보다 꼭 열일곱 살이 많다. 영감은 여든을 앞두고 버갯속 영감이라는 애칭을 하나 더 얻은 셈이다.

  내가 붙여서 그런지 버갯속 영감이 이장 영감보다 훨씬 살갑게 들린다. 그러나 정작 영감 당신은 버갯속 영감으로 불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

 

  “나, 도내(島內) 이장, 이십팔 년 했시유.”

  버갯속 영감은 평석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우리 집 마당 오른편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나무 밑에는 널따란 돌팍이 있는데 나는 평석이라 부른다.

  “조 앞, 간사지(干瀉地) 말이유. 조거 내가 막았슈.”

  영감은 턱으로 툭 트인 들판을 가리켰다. 바둑판처럼 경지 정리가 잘 된데다 불어오는 마파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이 기름진 논이라는 걸 단번에 알려 주었다.

  “조게가 본시 바다였슈. 바다가 논이 된거유.”

  영감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오일육(五一六) 나고 말이여...”

  영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장 된 기... 바로 고 이듬핼 거여... 서른두 살이었슈.”

  나는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기... 글시, 사람 사는 기 아니여. 논이 있슈 밭이 있슈?” 

  한 마디를 던지고 영감은 한참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갑을 꺼냈다.

  “그런디 바닷가닝께... 암거나 해서 끄쩐끄쩐 먹고 살았시유.”

  영감은 물끄러미 간사지를 내려다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망울을 껌뻑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영감은 당신의 손가락 사이에 담배개비가 끼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영감은 다시 부산하게 이쪽저쪽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프라스틱 가스라이터를 겨우 찾아 불을 붙였다.

  내 시선은 온통 영감의 손에 가 있었다. 영감은 첫 모금을 볼이 오목하도록 힘껏 빨았다. 담배개비의 불기운이 단숨에 살아났다.

  영감은 눈을 감은 채 담배연기를 음미했다. 이윽고 공중을 향해 길게 내뿜었다.

  “원논, 조게... 조래 뵈두 기냥된 기 아니유.”

  영감은 들릴듯 말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도내리 이장 이십팔 년의 역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따금 버갯속 영감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일 년 남짓 사이에 나는 여러 번 들었다.


  ‘도내리의 탈출.’


  버갯속 영감의 활약상을 나는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했다. 그리고 ‘버갯속 영감 스토리’라 이름을 붙였다. 어쩌다 곁가지가 보태지고 빠졌으나 줄거리는 찍어낸 붕어빵이나 다름없었다.

  희한하게도 버갯속 영감 스토리는 들을 때마다 맛이 달랐다. 처음만큼 짜릿한 맛은 덜해도 들으면 들을수록 묵은 장맛처럼 개미가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돌고도는 굽이굽이마다 영감이 실어내는 표정이나 어감은 나의 심중에 그대로 와 닿았다.


  “우리라구 못할 거 없짢유. 다 하는디...”

  영감의 목소리는 탁했다. 버갯속 영감은 사십년 전의 청년 시절로 돌아갔다.

  영감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담배가 마냥 타내려가고 있었다. 한 모금 밖에 당기지 않은 담배개비에 벌겋게 불이 붙었다가 이제 긴 꼬리를 내며 파르스름 피어올랐다.

  급기야 통째로 재가 되어 영감의 발 등에 떨어졌다. 영감은 바스러진 담뱃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별거 아니라는 듯 이내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느릿느릿 다시 불을 붙였다. 타버린 담배 몇 개비쯤이야 영감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우리는 했슈. 해냈다니께.”

  영감이 힘차게 내린 결론이었다. 영감은 언제나 이 부분에서 마음이 급했다. 나는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어코 해낸 쾌감이 만면에 번져났다. 어쩌면 버갯속 영감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버갯속 영감이 팔을 벌린 앞가슴은 든든해 보였다. 지난 세월에 많은 사연을 보듬고 얼싸안아 포만감이 넘쳐흘렀다.

  나는 두고두고 할 이야기꺼리를 가진 영감이 부러웠다. 영감 앞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걸 제쳐두고 영감에게 어울려드리는 일이야말로 지금 내가 해야 할 도리였다. 어느 듯 나도 버갯속 영감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이구, 나 말이여, 못 들어. 귀먹쟁이여.”

  버갯속 영감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늙으머 벼라별 증세가 다 나와. 이러다 가는 기여. 생로병사여.”

  영감이 뿜는 담배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다음 글 20여회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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