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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6)입장료

입장료                                                                                                          (6회)

 

  ‘김 사장네 안건’이 상정되자 늘어졌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문 반장의 제안 설명에 이어 곧장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당사자인 우리 내외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적이었다. 나는 면전의 시시비비가 껄끄러워 자리를 피할 가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사람과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곳 안도내는 물이 귀했다. 상수도는 도내 주민들에게 숙원 사업이었다. 우리 집 밑에서 포강으로 난 논두렁 근처에 샘터 자리가 두 군데 남아있다. 여기서 물을 길어다 먹었을 정도였다.

  지금 간이 상수도는 삼년 전에 건너편 어은의 염창마을에서 끌어왔다. 최근에 와서야 물 걱정을 덜었다. 옛날이면 꿈도 꿀 수 없었다. 간사지 원뚝(제방)을 따라 이 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였다. 군(郡)에서 예산을 지원해 삼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완공이 되었다. 처음 안 사실이지만 당시에 세대별로 얼마간 부담했던 금액이 있었다.

  앞서 안건과 달리 토론의 열기가 더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디를 가나 입심이 센 사람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다수의 관심과 달리 주장이 장황해 맥이 빠지기도 했다. 

  이제 한 동네 주민이 되었는데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뭘 받느냐는 의견이 나왔으나 힘을 받지 못했다. 더 내야한다, 너무 부담이 많다는 등 격론이 다시 벌어졌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옥신각신하는 게 어색했던지 얼마면 좋겠냐고 한번 물어보자는 돌출발언이 나왔다. 그러자 그게 말이 되느냐고 우루루 한바탕 핀잔의 몰매를 맞았다. 오늘 반상회 중에 처음으로 너나없이 다 같이 웃었다.

  어느 정도의 금액 부담을 하는 걸로 대세가 흘러갔다. 나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 들어와 ‘물꼬를 트는데’ 모르는 체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백오십만 원으로 결정이 났다.


  “그냥 주민 기금으로 봐유.”

  옆에 있던 백발노인이 말했다.

  “고맙습니더.”

  “많으먼 많구, 생각 나름이어유.”

  그 노인이 내 무릎을 슬쩍 쳤다. 동네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어쨌든 나는 후련했다.

  “물이 귀허구먼유. 요다음엔 누가 와도 안줄 거유. 김 사장님이 첨이구 마즈막이유.”

  문 반장이 큰 소리로 에둘러 다짐을 했다. 모기를 쫒느라 손에 쥔 부채질도 다들 갑자기 빨라졌다. 저만치에 아까부터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도와줘 고맙다는 인사말로 기나긴 숙제 하나를 마쳤다.

 

  반상회 공식절차가 끝나자 회관은 웃음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다섯 안건에 두 시간이 지난 뒤끝이었다. 큰 방안에 남자와 여자로 경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여름이라지만 밤이 이슥했고 농촌에서 여름밤은 짧았다. 서서히 자리가 재편성되면서 주당 파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컬컬해질 대로 해진 목을 적시느라 꺾지 않은 소주잔들이 공중을 날았다. 한쪽에선 일찌감치 노래방 기기에 매달려 흘러간 노래가 흥을 돋우었다.

  두어 순배 잔이 돌았나 했는데 갑자기 서울사람 노래 한번 들어보자는 신청이 거세게 일었다. 나는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다. 앙콜 소리가 들렸으나 그다지 열렬하지 않아 한 곡으로 끝났다. 내가 노래를 못했다기보다 노래를 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혹시 서운하시지 않으실 가, 죄끔 걱정이 되네유.”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자 어촌계장이 다가앉으며 말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귀를 세웠다. 어촌계장은 버갯속 영감의 큰 아들이었다.

  “아주 시원하네요.”

  “예의 없다 생각 마세유. 길게 보세유.”

  나에게 소주잔을 권하며 말했다. 반상회에서 티격태격했던 광경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입장료는 내야지요.”

  “그리 생각하시면 고맙구요. 아버님도 좋은 어른 오셨다고 몇 번이나 말씀이 계셨시유.”

  “정말 훌륭한 어른이십니더.”

  “이렇게 오실 만 헌 분들이 오셔야 발전을 하는디... 도내라는 데가 하두 어두워서...”

  “내가 온다고 발전은 무슨...”

  “지나 보먼 아실테지유. 도내도 괜찮아유.”

  “조금 씩 보태고 나누고... 그저 어울려 사는 거지요.”

  “쉬운 일이 않잖아유.”

  “짜다리 베풀지도 못하는 판에... 그저 누 안 끼치고... 사람 사는 기 그런 거지요.”

  “저도 내일모레 오십이네유. 맞는 말씀이세유.”


  흘러간 노래 디스코 메들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갑자기 보륨을 올렸다. 옆 사람 얘기도 들리지 않았다. 술잔이 돌대로 돈 뒤라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앉은 사람들보다 일어선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 석과 여자 석 사이가 애매해졌다. 술 팀과 노래 팀의 경계도 무너졌다. 이제 서너 사람만 줄기차게 소주 파에 뭉쳐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매를 맞았기에 느긋하게 소주 파에 합세할 수 있었다.

  집사람이 두어 곡을 연달아 불렀다. 둘러보니 앉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젠 아지매도 아재도 신나게 흔들었다. 누군가가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도 일어났다. 한바탕 디스코의 광풍이 지나갔다. 앙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리 고모 시대는 인제 끝났슈. 강력한 라이발이 새로 오셨슈.”

  어촌 계장이 집사람과 자기 고모를 번갈아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맞슈. 맞슈.”

  어촌계장의 말에 다들 박수를 치며 호응을 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수긍하는 걸로 보아 고모의 노래솜씨가 이 동네에서 꽤 장기집권을 하긴 했다. 대충 고비가 꺾일 무렵에 어촌계장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김 사장님이 우리 도내에 오셨시유. 안도내 반민(班民)이 되어주신 김 사장님께 다시 한 번 환영의 박수를 칩시다...”

  “이런 분들이 오셔야 해유. 그래야 우리 도내가 발전을 합니다.”

  어촌계장은 나를 오늘의 주인공으로 삼으려 여러모로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별로 새겨듣는 것 같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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