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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5)반상회

반상회                                                                                                                      (5회)

 

  상량은 했으나 장마가 코앞에 있어 여전히 마음이 급했다. 지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마룻대에 서까래를 걸치는 일이 여러 날 이어졌다. 벽난로 공사와 지붕공사는 함께 진행이 되었다. 벽난로 연통이 기와지붕 위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까래 위에다 판자를 깔아 기와를 올릴 준비를 마치니 지붕의 모양새가 드러났다. 용마루도 흐름이 잡혔다. 황토 흙은 우리 집 땅에서 그대로 파서 썼다. 작두로 썬 짚과 황토 흙을 적당한 비율로 물에 개서 뭉친 다음 크레인으로 달아 올렸다.

  기와는 홍성(洪城)에서 가져왔는데 절간 기와였다. 대목수 이(李) 씨는 인근의 흥주사(興住寺)를 비롯하여 사찰 내 공사를 한 경험이 많아 일찌감치 나에게 홍성 기와를 추천했다.

  기와를 이는 공사는 고소작업이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이므로 보험에 들어달라는 인부들의 요청이 있었다. 역시 안전이 우선이었다. 보령에 있는 근로복지공단을 찾아 보험에 들었다.

  기와장이들의 숙련된 걸음걸이가 아찔했으나 능란하고 가벼웠다.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호흡을 맞추려 질러대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공사판을 깨웠다.


  어느 듯 팔봉식당에서 배달해먹는 점심도 진력이 났다. 기와를 올리고 나니 긴장이 풀어진 탓인가. 매번 먹던 음식의 맛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더덕이 안 들어간 동태 매운탕에 식당 주인을 불러 까탈을 부렸다. 너무 더우니까 라면 새참이 남아돌고 반주삼아 마시는 소주도 칼칼했다. 인부들은 점심을 먹은 다음 자투리 그늘을 찾아 슬쩍 한 숨씩 꾸었다.

  주위는 쑥, 냉이, 머위가 지천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두릅이나 옻나무 순을 따는 사람도 가끔 보였다. 고사리 꺾는 시절이 지나자 뽕나무 오디가 탐스러웠다. 낯선 차들의 내왕이 빈번해지는 가 했더니 주말이었다. 체험학습을 한답시고 어른이나 애 할 것 없이 개펄에 들어가 능젱이나 왕발이를 잡으며 부산을 떨었다. 바닷가가 아니랄까봐 달랑게가 공사판까지 기어 올라와 내 발아래 어슬렁거렸다.


  “지금까진 아무 것도 아뉴. 지붕만 덮어봐유. 정신 없다니까유.”

  상량할 때 대목수의 말이 생각났다. 지붕을 덮고 나니 아닌 게 아니라 상황이 달라졌다. 차츰 이 공정과 저 공정이 서로 맞물려 공사가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먼저 창틀부터 끼웠다. 비바람을 막아줄 창문이 급했다. 거실 정면의 창은 길이가 사 미터가 넘어 특수제작을 했다.

  실내 바닥 공사가 컸다. 켜켜이 모래, 자갈, 소금, 황토, 숯을 넣어가며 그 위에 난방 배관을 했다. 이어 기포 공정 후에 게르마늄을 섞은 황토를 발라 마감 미장을 했다. 집안에서는 문짝을 다는 일부터 벽난로 설치공사가 이어졌다. 집 밖으로는 수도, 난방 보일러 공사와 정화조 공사 등이 남아있었다.

  기와집에서 때깔을 내는 일은 역시 목수의 몫이었다. 대목수를 나는 이 사장이라 불렀다. 이 사장은 다음다음 공정에 일어날 문제를 사려 깊게 짚어주었다. 장단점을 고려하여 선택을 하게 만드는 장기가 있었다. 건물의 시공주가 해야 할 생짜배기 고민을 덜어주었다. 지금까지 여러 공정을 하는 동안 외고집으로 자기주장을 몰아가는 인부가 있는 가하면 나의 의사를 사전에 타진해 가면서 조용히 접점을 찾아가는 양반도 드물게 있었다. 이 사장은 유일하게 후자에 속했다. 

  거실의 천정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시원하게 들보가 보이도록 계획을 했으나 너무 높아 한 겨울에 당할 외풍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지붕 구배를 따라 중간에 천정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쓴 상량문이 천정 안으로 묻혀버렸다.

  계획이 바뀌다 보니 시간이 걸리고 손이 많이 잡혔다. 대목 이 사장은 문틀이나 문짝, 천정을 모두 ‘더글러스 목(木)’을 추천했다. 장인의 안목이었다. 두고 보면 돈이 제 값을 한다고 다들 말했다. 자꾸 올라가는 눈높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에 도내 3반 반상회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상수도 연결과 정화조 관로를 빼는 일이었다. 공정이 진행될수록  스트레스 지수도 잔뜩 따라서 올라갔다. 

  당초 땅을 살 때 계약의 전제조건이 있었다. 계약서에는 생활 기반시설을 하는데 장애가 없도록 해당 주민의 동의가 부기로 명기되어 있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뒤늦게 이러쿵저러쿵 낭패를 당할 일을 나는 우려했다. 그러나 그건 명문화일 뿐 실제 상황은 하나하나 돌파를 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자주 눈을 익힌 동네사람에게 언젠가 슬쩍 한번 찔러보았다. 

  “수도, 하루아침에 된 기 아뉴. 원체 물이 귀헌 데라...”

  “거참, 주민들 동의가 쉽지 않을 테지유.”

  다들 별다른 뜻 없이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듣는 나는 심각했다.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걱정을 너무 앞당겨하는 것 같아 마음 한 쪽에 접어두었으나 안 들으니 만 못했다. 옆집으로 가는 상수도관이 바로 집 뒤로 지나가고 있어 공사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십 여 호 전 주민의 동의를 받아야하는 자체가 껄끄러웠다.

  나는 인사를 겸해 먼저 이장을 찾아갔다. 이장으로서 자신의 입장 설명이 길었다. 예상을 했던 대로 원칙론을 재확인하는데 그쳤다.

  “새로 들어오시는 분을 시원하게 해드리지 못해 갑갑허네유.”

  육(陸) 이장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나를 위로했다. 육 이장의 말대로 갑갑하긴 갑갑했다. 수없이 지하수를 파도 제대로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니 상수도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길은 하나 밖에 없어 갈 길은 더욱 명료해졌다. 어떻게 되든 동네가 정한 절차를 직접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文) 반장에게 임시 반상회를 해서라도 정리해주기를 부탁했다. 하기야 꼭 상수도 문제만이 아니었다. 동네사람들과 다 같이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나는 기대 반 염려 반으로 반상회를 기다렸다.

 

 

  아침부터 집사람과 나는 바빴다. 읍내에 나가 농협 하나로 마트와 재래시장을 오가며 반상회가 끝난 다음 뒤풀이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시원한 맥주 한 박스와 소주 두 박스에 얼음을 채운 수박 두 덩어리는 미리 사 두었다. 저녁시간에 맞추어 다시 시장에 나가 따끈한 순대까지 사서 보탰다.

  칠월 말은 삼복인데다 해가 길대로 길었다. 주민들은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다음 아홉시 가까이 되어서야 하나둘 어민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이 더운데 왠 반상회여?” 

  “원제 반상회 허고 오늘인겨.”

  현관을 들어서며 오랜만에 열리는 반상회에 다들 관심을 나타냈다. 손에 손에 다들 부채를 든 모습은 한가로웠다. 저녁 모임이 싫지는 않은 듯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우리 내외는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일일이 수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얼굴이 익어 그다지 서먹하지는 않았다.

  눈대중으로 성원을 확인한 문 반장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세 번 치는 것으로 반상회 개회를 알렸다. 안건이 상정되거나 통과 될 때마다 문 반장의 손이 사회봉을 대신했다.

  첫 안건은 ‘수도요금 산정 조정안’이었다. 시시콜콜 주민 총의 운운하는 모양새가 지루하게 흘러갈 조짐이었다. 결국 첫 안건에서 시간을 다 잡아먹었다. 회의의 진행은 내가 보아온 어떤 회의보다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민주적이어서 서로 답답해하는 눈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문 반장은 절차상 하자에 잔뜩 신경을 쓰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마지막 안건으로 ‘김 사장네 상수도 연결 승인의 건’이 역시 방바닥을 세 번 치면서 상정되었다.


  도내에서 우리 집을 ‘황토집’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김 사장네 집’으로도 불렀다. 노인 중에 더러 ‘황토방’이라고 해서 실소를 자아내곤 했다. 그리고 ‘인천 31모’로 시작하는 나의 자동차 번호판 때문에 인천(仁川)에 집이 있거나 회사가 있는 걸로 알려졌다.

  “근디 인천서 무어 하는겨? 맨날 들어두 까먹는다니께.”

  버갯속 영감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동안 몇 번 설명을 해드렸으나 번호판을 볼 때마다 되묻곤 했다. 인천을 굳이 들먹이는 건 역시 차 번호판 때문이었다. 도내 뿐 아니라 인근의 팔봉, 구도, 호리(虎里) 사람들은 인천을 친정집처럼 드나들었다. 하다못해 사돈 팔촌 중에 한 사람은 인천에 살고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구도 항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이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서해 연안을 잇는 뱃길을 따라 온 문물이나 자원이 구도 항을 통해 내륙으로 흘러들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런 면에서 바닷가 태안이 내륙인 서산보다 앞섰다. 일정 때는 태안이 서산군(瑞山郡)에 편입되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태안 사람들의 독립운동 하듯 복군(復郡)을 추진했다. 십여 년 전에 기어코 소원을 이루었다.


  “마루보시 호(號)가 있었슈. 육이오 사변 때 폭격에 맞아 까라 앉아 버렸는디...”

  버갯속 영감은 가끔 해방 당시의 여객선이던 마루보시 호의 추억을 더듬었다. 인천 연안부두까지 일곱 시간 걸리던 칠복 호에서 네 시간 은하 호로 바뀔 때 느꼈던 흥분을 아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인천 가는 뱃길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꿈과 설렘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내 차 번호판에 쓰인 인천이라는 글자 하나에 동질감을 보였다.

  “요거 봐, 지금 인천시장(市長)두 태안 사람이여.”

  버갯속 영감은 자랑삼아 들먹였다.

  “조기, 입구 모닝빌 말이여, 기 양반도 인천서 왔다더마.”

  도내나루 들머리에 우리 집과 거의 같이 공사를 시작한 펜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영감은 이런 저런 사람들이 도내를 찾아드는데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려, 워쩌 요기루 오게 된겨?”

  영감은 오늘도 나에게 물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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