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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 공적비

 

공적비                                                                                                                                 (2회)

  

  태안군(泰安郡) 태안읍(泰安邑) 도내리(島內里) 2구.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안도내라 부른다. 반도처럼 튀어 나온 끝자락이라 멀리서 보면 섬처럼 보인다. 우리 집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뜰은 사십 여 년 전까지 바다였다. 안도내는 말 그대로 바다 가운데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옛날에는 이곳이 영락없이 낙지머리를 연상하게 했다. 일찍이 이십여 호 남짓의 집들이 낙지머리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마을 뒤로 당산(堂山)이라 불리는 산등성이가 아름드리 해송을 거느리며 솟아있다. 바닷가라 마을을 아우르며 위세를 자랑한다.

  중턱에는 삼백 년 된 팽나무가 마을의 온갖 사연을 꿰며 내려다보고 있다. 팽나무 위로 우중충 하나 나지막한 제각(祭閣)이 버티고 섰다. 도내가 섬처럼 보이나 섬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 집 뒤로 난 언덕배기가 이웃 마을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안도내는 태안의 만대(萬垈)와 당진의 독곶 사이로 길게 내려온 가로림만(加露林灣)의 맨 아래  끄트머리에 있다. 멀리 남쪽으로 태안의 백화산(白華山)이 우뚝하고 동쪽에는 서산(瑞山)의 팔봉산(八峯山)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바로 뒤로 구도(舊島)항이 마주보이고 그 사이에 당도(堂島)가 두둥실 떠있다. 아물아물 고파도(古波島) 등대를 건너 뛰어 청산리(靑山里) 포구가 살짝 비껴서 다가온다.

  큰길가 ‘도내 나루터’ 표지판이 안도내 길목임을 알려준다. 도내나루. 불러도 들어도 언제나 정겹다. 안도내는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 조용히 들어왔다 나가는 갯마을이다. 파도소리는 물론 갈매기마저 없어 한가롭다. 본래 파시(波市)가 생각나는 어촌이 아니었다. 아무리 코끝을 세워도 고기 비린내조차 없다. 한없이 펼쳐진 개펄이 단조로워 조심스럽다. 왁새(억새)들이 무리지어 하늘거릴 때는 삼라만상이 절묘하다. 빼어나지 않아 안겨오고 제멋대로여서 수더분한 경관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렸다.

 

  선조 대대로 이어온 이 땅, 어느 곳인들 안 그랬을 가. 수려한 산천경개가 거저 밥 먹여 주지 않았다. 논밭이 모자라 먹고 살기 힘들기는 이곳 도내도 마찬가지였다. 도내가 어촌과 농촌을 아우르긴 했으나 도무지 발전성이라고는 없었다. 지금까지 웬만한 배 한척 갖다 댈 선착장도 만들지 못했다. 일 년 삼백 육십오일 밭뙈기와 개펄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해도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태안 읍내 한번 출입에 하루해가 저물었다는 버갯속 영감 말이 갈수록 실감났다. 상창(上倉) 북창(北倉) 인평(仁坪)을 돌고 돌아 태안 읍내를 오갔다니 내 발바닥에 절로 땀이 배었다. 뱃길로 한참 들어가 한갓진 마을이었던 어송(漁松)이 지금은 태안과 서산을 잇는 요지가 되었다. 바다를 메운 간사지 덕분이었다.

  태안반도의 해안이란 꼬불꼬불하기로 이름이 났다. 오죽했으면 칠백년 전에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掘浦運河)를 팠을 가. 소금과 세곡을 실어 날랐던 안흥량(安興梁) 뱃길은 사나웠고 서산, 아산, 평택을 거치는 아산만(牙山灣) 육로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버갯속 영감은 도내에서 이십팔 년 동안 이장을 지냈다. 삼십대의 젊은 이장은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일구었다. 말 그대로 문전옥답. 논을 만들어 벼를 생산하기까지 ‘버갯속 영감 스토리’는 한편의 드라마가 되고 남았다.

 

  “도내 말이여...”

  버갯속 영감은 잔잔하게 이야기 실마리를 꺼냈다.

  “손바닥 만헌 땅, 맨날 파버야 뭐가 나오남? 다들 새끼들은 많구...”

  영감의 탄식이었다.

  “때가 온거유. 새마을 운동. 요게 조게서 잘 살아보세 하는 디... 거참, 정신이 번쩍 들데...”

  어느 날 새벽 종소리가 젊은 이장의 심장을 두드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파월 장병의 군가가 애틋했고 사우디 근로자들의 땀방울에 온 국민은 하나같이 눈물을 글썽였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섰다. 잘 살아보세 합창에 날이 샜고 수출과 건설의 망치소리에 날이 저물었다.

  “다 하는 디, 우리라구 못 할 거 없짢유?”

  영감은 가슴을 활짝 폈다. 나도 덩달아 어깨가 들썩여졌다.

  “눈을 뜬거여. 모다 우리가 헐 일이었슈. 서둘렀슈.”

  젊은 이장은 의욕이 넘쳤다. 근면, 자조, 협동으로 온 나라가 뭉쳤다. 팔도강산은 조용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사에 일찍이 없었던 깨달음이 전국 방방곡곡에 들불처럼 일었다.

  “잘 사는 건 관두구, 먹고사는 기 급했슈.”

  젊은 이장의 소망은 소박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초근목피의 보릿고개를 생각했다. 민초들이 넘어야했던 고난의 길이었다. 한동안 잊었던 보릿고개를 생각하며 오늘 영감과 함께 걸었다.

 

  “별 수 있깐? 원제까정 기대려. 평택 사람 데려다 시작했슈.”

  바다를 막는 간사지 공사였다. 

  “일이란 건 저질러놓고 봐야한다니께...”

  하면 된다는 말 그대로였다. 오로지 혈기였다.

  “근디, 어이구, 무허가래.”

  불법 매립이었다. 

  “몽덕씬 거여. 허허.”

  까다로운 행정 절차가 젊은 이장이 가는 길을 막았다. 영감은 자세를 고추 세웠다.

  “나, 깅찰서(경찰서) 많이 갔슈. 찔찌리 짜구서 오라 가라 하능겨.”

  청년 이장의 오지랖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관행이 시도 때도 없이 이장의 발목을 잡았다. 쌈지 돈을 찔러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낭중엔 형사 고발꺼정 허데. 허.”

  영감은 격정을 그대로 목소리에 실었다.

  “내가 도적질을 핸기여? 뭐여? 먹고 살려는디.”

  하소연이 절절했다.

  “어이구, 하루해가 급했슈.”

  공사 현장에 있어야 할 이장이었다. 이래저래 매일같이 읍내 출입이니 듣고 있는 내가 답답했다. 영감은 침을 삼키며 잠시 숨을 골랐다.

  “허허, 요건 아녀. 눈에 뵈는 기 없데...”

  영감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금니를 깨물자 영감의 입술 양끝에는 몽글몽글 거품이 맺혔다.

  “늘창 멀컨히 있을 수만 있남?”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니나 다를 가 젊은 이장은 폭발했다. 활화산처럼 불을 뿜었다.

  “그런디 워쩔 것이여... 뽄때 나게 대들었슈.”

  나는 어릴 때 영화관이 떠올랐다. 이런 장면에서 어김없이 박수가 터졌다. 당연한 귀결에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새 청년 이장의 열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내 어깨 너머로 넘실거렸다.

  “기러닝께 끔먹허데...”

  영감은 비로소 한숨 돌렸다.

  “나도 몰랐슈. 밤잠 안 자구 돌을 날으구. 도시 그런 힘이 그 땐 워디서 났는지...”

  잘 살아보자는 몸부림이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굉음을 내며 개미떼처럼 오가는 덤프차의 행렬이 어제처럼 눈에 선했다.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불도저와 포클레인의 엔진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도내리 청년 이장은 일꾼들을 앞세우고 주민들을 떠밀어 바다를 메워나갔다.

  “스나스나 했시유...”

  영감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넉잡아 삼년 봤는디... 말이 삼년이유...”

  영감은 길게 숨을 들어 마셨다. 나는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감의 눈가에 살포시 이슬이 맺혔다.

  “우리는 해냈슈. 허허.”

  영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었다. 어도(漁島)를 가로지르는 간사지가 새삼 내 눈에 들어왔다. 영감의 시선도 간사지에 머물렀다. 질펀하게 물을 댄 들녘은 모내기를 앞두고 있었다. 간간이 농로를 오가며 물꼬를 고르는 사람들이 한가롭기만 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려... 뉘긴들 기 짓을 핼라구 해긴 했깐?”

  영감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나를 깨웠다. 나는 조용히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나는 청년 이장이 혼자서 감내해야했던 고독을 읽었다. 사십 년을 기다렸다 넘어온 너울이 나를 덮쳤다. 한바탕 바위를 때리고 허공에 포말을 뿌리며 사그라졌다.

 

  “어이구, 허리야.”

  격정을 온몸에 실었던 탓일 가. 영감은 갑자기 허리의 통증을 호소했다.

  “나, 시(세) 번을 다쳤슈. 전선 가서 말이여...”

  영감은 주먹으로 당신의 허리를 툭툭 쳤다.

  “허허, 워쩌다 청춘세월 다갔슈. 인젠 아무 것도 못혀.”

  “전쟁이 따로 없지예.”

  “나이 들었다구 기냥 노는 기 아녀.”

  “그럼예.”

 

  도내리 마을 회관 앞뜰에는 ‘石浦 金鍾萬里長 功績碑(석포 김종만이장 공적비)’가 서있다.


  ‘1962년 1월19일부터 1990년 2월 5일까지 28년간 이장으로 근속하면서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1968년 도내어항 초소에 사재 80만원을 들여 지하방카를 구축 초소근무를 철저히 지도 감독한 공로로...’

  ‘1971년 마을 안길 3천5백 미터 개설 및 부락 진입로 3천8백 미터를 확포장하고 도내 어은 간 매립공사를 3년에 걸쳐 완공하는데 주역이...’

  ‘그리하여 기초마을 자립마을을 거쳐 승자마을로 이제는 부자마을로 이끌었다.’


  어느 날이었다. 

  “허허, 내 공적비를 봤다구?”

  버갯속 영감의 실눈이 반짝거렸다.

  “도내에 왔으모 공부 좀 해야지예.”

  “그건 그려. 뭐시든 알아야 헌다니께...”

  영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야한다는데 힘을 주었다.

  “조오기... 조, 재빡 말이여.”

  영감은 간사지를 건너뛰어 가지런히 드러누워 있는 야산을 가리켰다. 솔밭 사이로 살며시 백화산이 보이고 그 옆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온 오소산(烏巢山)이 눈에 들어왔다. 야트막하게 구릉을 이루고 있어 유유자적하는 충청도 지형을 그대로 빼 꽂았다. 넓은 초원이 눈에 들어왔다. 곧 누군가가 개간을 해서 인삼포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조 산마렝이가 우리 땅이었시유.”

  “..............”

  “그 때 돈으루 오백 이십 만원에 팔았시유. 꽤나 큰 돈이던디. 어이구, 금시 없어지더구머.”

  “뭐 하셨십니꺼?”

  “뭘 했냐구? 좀찌게 헐 일 했시유. 허허.”

  버갯속 영감은 허허로이 웃었다.

  ".............." 

  “그려, 뉘가 알기나 아남?”

 

-다음 글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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