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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0)정

                                                                                                                        (10회)

 

버갯속 영감과 대화는 주거니 받거니 아기자기한 맛은 없다. 영감이 주로 말하고 나는 듣는 편이다. 영감의 표현대로 영감은 ‘귀먹쟁이’이다. 귀에 바짝 갖다 대 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 두 팔은 물론 때로는 온 몸을 동원한다. 희한하게도 전화 통화는 거의 다 알아듣는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어른들과 대화가 설지 않다. 어머니가 예순쯤에 완전히 청력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알아온 중이염이 서서히 난청이 되었다. 한 때 보청기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어지럼으로 달리 고생을 한 뒤 그 마저 던져버렸다.

  지금 어머니와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없다. 손바닥에다 단어 몇 개를 적어드리면 입의 움직임을 보며 재빨리 알아차린다. 이렇게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러다 보니 가족끼리 서로 장애를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낸다.


  버갯속 영감은 좀 다르다. 손바닥이든 어디든 글자를 써 주면 손으로 내친다. 처음에는 잘 안보여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안경의 도움 없이 책을 읽을 정도다.

  영감의 동문서답이 웃음을 자아낸다.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내용이나 의문이 있더라도 넘어간다. 한참 뒤에 다른 이야기를 하다 해답이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전복죽 먹다 건진 진주보다 반갑다.


  “허이구. 근디 말이여. 애콩(완두콩)을 왜 심어? 자꾸. 그렁께 맨날 아들놈허구 다투지.”

  영감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예?”

  “집에 할망구말이여.”

  나를 만나자마자 영감은 할멈 얘기로 시작했다.

  “예초기로 풀도 깎구 경운기가 지나가야 허는디, 글밭 맹글어 어쩌자는 거여. 걸리적거려서 되겄서? 밭둑에 말이여...”

  “.............”

  “콩 심지 말래두 이 할망구가 얘길 들어먹어야 말이지... 어이구. 쯔쯔쯔.”

  영감은 혀를 차며 주먹을 꽉 쥐었다.

  “허구헌날 이렁께 전딜 수 있깐? 워디 옹애기 같이 꽉 맥히서 말이여.”

  영감은 갑갑한 심사를 풀어헤쳤다. 언제부턴가 할멈 흔단이 간혹 있었으나 오늘처럼 삐짝찌는 않았다.

  “이러큼 되설져서야 원. 허허.”

  영감과 할멈 사이의 한랭전선이 훤히 보였다. 나는 팔십 줄에 앉은 영감 할멈의 부부 싸움에 기승전결이 궁금했다.


  버갯속 영감이 풀어놓는 이야기인 즉, 자투리땅이 아까워 할멈이 온갖 밭 둘레에다 강낭콩이나 완두콩을 뿌렸다. 농기계가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데 이놈의 콩들이 자랄수록 방해가 되었다. 그때마다 아들이 짜증을 부렸다. 아들놈의 짜증도 한두 번이지 옆에서 듣다보니 이젠 영감이 왕짜증이 나버렸다.

  “어이구, 어이구.”

  감정이 새삼 되살아나 영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난감했다. 영감은 단지 집안의 어른이었다. 가부장의 권위를 찾고 자기주장을 앞세우지 않았다. 오늘따라 심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걸 보니 차츰 내가 긴장되었다.

  “다들 그만 혀야 헐 때 그만 혀야 하는디. 시절이여. 어이구.”

  영감은 할멈이나 아들 모두 못마땅했다.

  “낸들 듣기 좋남? 어이구, 한두 번 허고 관 두야지.”

  할멈에 대한 원망이 아들로 옮아갔다. 버갯속 영감 댁에 형성된 기류의 진원지를 알만 했다.

  “똑 같혀. 둘이... 똑 같혀. 어이구.”

  영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감은 할멈과 아들이 똑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똑 같지 않았다. 할멈에 대한 영감의 애잔한 정이었다. 같이 해온 오십년 세월에 오롯이 남은 손익계산서였다. 자식 놈한테서 잔소리를 듣는 할멈이 영감은 안쓰러웠다. 마누라를 만만하게 대하는 자식 놈이 섭섭했다. 

  “손안에 자식이라카데예.”

  “허허...”

  “다 큰 자식, 우짤낍니꺼예.”

  “어이구.”

  “할망구가 짼한께네, 이러시는 거지예?”

  “어이구, 난 몰러.”

  “모르기는예.”

  티격태격해도 마누라는 마누라였다. 다른 방에 가있는 자식이 한 방 쓰는 마누라와 같을 수는 없었다. 할멈에 대한 버갯속 영감의 애정도수가 아들 놈 때문에 증폭된 걸로 나는 확신했다. 나의 진단을 모른 채 영감은 저간의 사정을 하소연하며 심사를 달랬다.

  “쯔쯔쯔, 그려. 여자들 욕심이 대단 혀. 왜콩, 고게 뭐라구...”

  영감은 은근 슬쩍 다시 할멈을 걸고넘어졌다. 

  “한시반시 움직여야지예.”

  “한나잘에는 바다에 바지락 긁어 돈 맨들구, 해거름에는 밭일 허구... 한수꿈 안 놀고 죽을 판 살판 하는 기여.” 

  “다 묵고 살라꼬 하는 거 아입니꺼.”

  “돈이라머 자다가두 일어나. 남자들은 저리 가라여. 쯔쯔.”

  “무신 말씀예. 여자들이 그리라도 한께네예.”

  “허허, 그런다구 세간이 느남?”

  “남정네들이 천상 잘 할 수밖에 없십니더. 할머니예, 지난번에 봉께네예, 아이고, 새복부터 김맨다고 나와서 하루 죙일 깨밭에 엎드려 있데예. 그 땡볕에. 요새 사람들 죽었다 깨나도 못합니더. 놀래 자빠짓십니더.”

  내가 할멈 역성을 들자 영감은 역부족임을 알아차렸다.

  “허허.”

  영감은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쪼끔 몰뚝짢지예. 그래도 우짭니꺼.”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영감은 퇴로를 엿보았다.

  “난 농사는 모르고 살았시유. 바다 일두 해 봤남? 워디... 집에 있기나 있었남...”

  “그렁께 이제사 혼나지예. 할망구 고생시킨 기 무신 자랑이라꼬예.”

  나는 영감을 계속 긁었다.

  “그나저나 요샌... 일도 아녀. 기계가 다 한다니께.”

  버갯속 영감은 객쩍게 웃으며 엉뚱한 데로 말머리를 돌렸다. 평생의 희로애락이 덧없는 일이었다. 부부란 긁고 싶을 때는 긁어야 아려도 시원했다.


  버갯속 영감 댁을 보며 시골 부자, 일 부자라는 말이 그대로 맞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사일은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요사이 농사야 아무리 기계로 한다지만 역할이 줄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가족 간에 무덤덤하리만큼 별 대화가 없었다. 집안의 어른이 귀가 안 들리니 그럴 만도 했다. 왜콩을 심어 집안의 기상도를 흐리는 일쯤이야 애교로 보았다.


  언젠가 버갯속 영감은 고추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영감은 며칠 동안 거의 비슷한 시간에 우리 집 뒤를 지나갔다.

  “어이구, 허리야.”

  영감은 지게를 내리며 허리타령이 뒤따랐다. 우리 집이 중간 기착지였다. 고추밭까지 지게를 지고 가다 잠깐 숨을 돌렸다. 바지게에는 지지대가 여러 다발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신문지로 둘둘 만 가위와 노끈도 지게 옆구리에 얌전하게 끼어 놓았다.

  “허, 요것도 보통 일이 아녀. 대나무를 짤러야지, 깎아야지... 며칠 일이여.”

  영감은 대나무 다루는 솜씨를 슬쩍 내비쳤다. 다음 정월 대보름 때 복조랭이(복조리) 하나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오래 전에 받아둔 터였다.

  고추 지지대는 시눗대로 만들었다. 석자 정도 크기로 자른 다음 한쪽 끝을  뾰쪽하게 다듬었다. 눈대중으로도 한 짐은 무거웠다. 이왕 내친 김에 내차로 실어다 주었다.

  며칠 동안 나는 유심히 보았다. 영감은 허리타령을 할망정 고추 밭 일에 불평 한마디 없었다. 고추 농사의 자질구레한 갈무리는 오로지 버갯속 영감의 책임이었다.

  집사람이 마늘, 단호박, 참깨, 생강, 고추 등 몇 가지 농작물을 제철에 맞추어 서울의 이웃 사람들에게 가져다 돈 사주었다. 언젠가 몇 가지 대금을 함께 아들에게 주었더니 참깨 값은 어머니에게 직접 드리라며 따로 떼어 놓았다. 참깨농사는 영감의 할멈 몫이었다.


 

 

                                                                                                                                                 연재 계속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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