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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18) 원죄

  원죄                                                                                                               (18회)


  마늘을 시작으로 양파, 감자, 양배추, 단호박, 땅콩, 고추, 고구마, 배추, 무, 참깨, 들깨, 서리태, 완두콩, 강낭콩, 생강이 도내에서 생산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 년 열두 달 쉴 사이 없이 갈고 심고 거둔다.  

  집 바로 아래 터 삼백 여 평에 감자를 심었다.  이곳 팔봉 감자는 유명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인 이웃 양길(陽吉)에서 해마다 유월이면 '팔봉산 감자 축제'를 연다.

  읍내 장에서 씨감자를 구했다. 씨눈을 봐가며 이등분이나 삼등분으로 쪼갰다. 볏짚을 태운 재에 쪼개둔 감자를 버무려 소독을 했다. 어릴 때 본 눈썰미가 남아 그대로 해보았다.

  감자 농사는 보기완 달랐다. 나 혼자서 할 수가 없었다. 로타리 치는 건 버갯속 영감의 제매인 박 씨에게 부탁을 했다. 로타리 친다는 말은 쟁기질한다는 뜻이다. 트랙터가 밭을 깊게 갈아엎었다. 다시 돼지 똥 퇴비를 섞으며 흙을 고른 후 고랑을 내고 두둑을 만들었다.

  씨감자를 심을 차례였다. 동네 아주머니 두 사람들의 품을 샀다. 품값은 남자 여자 달리 시세가 정해져 있었다. 미리 만들어진 두둑을 따라 한 뼘 정도 간격으로 씨감자를 손가락 깊이로 꽂아 넣었다. 거기까진 쉬웠다. 시간도 얼마 안 걸렸다.

  멀칭비닐을 덮어야 했다. 한 사람이 앞에서 비닐 롤을 끌어나가면 뒤따라 두 사람이 양쪽에서 삽으로 흙을 떠 비닐 가장자리를 재빨리 눌렀다. 삼인일조(三人一組)로 나는 삽 담당이었다. 여차해서 바람구멍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비닐이 여지없이 날아 가버렸다. 멀칭은 온도와 습기를 유지하고 솟아나는 잡초를 견제했다. 

  세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 흙을 덮어 나갔다. 밭주인인 나도 하루 종일 함께 움직였다. 품은 노임하고 달랐다. 품이란 바쁠 때 도와준다는 뜻이어서 주인인들 뒷짐 지고 있을 수 없다.

  두 이랑도 하기 전에 힘에 부쳤다. 내 선창으로 간간이 쉬었다. 두 아주머니는 시종 펄펄했다. 세 이랑 째 들어가면서 나 때문에 작업속도가 떨어졌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평생 밭일 바다일로 단련된 두 아주머니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집사람은 아예 새참과 식사 조달 담당을 자처하며 작업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하긴 마누란들 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사단이 났다. 마파람을 견디지 못한 비닐이 벗겨졌다. 한 이랑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나머지 한 이랑은 긴 꼬리를 휘감으며 너풀거렸다. 어이가 없었으나 별 수 없이 곧장 다시 씌웠다. 혼자서 하는 복구 작업은 힘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제멋대로 펄럭거리는 비닐 한쪽 끝을 고정시키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애를 먹었다. 며칠 후 다른 이랑이 또 바람에 날렸다. 서울에 있는 나에게 옆집 배 선생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어쩔 수 없어 여러 날 뒤에야 복구를 했다.

  당초 마무리가 부실했던 탓이었다. 짜증스럽고 성질이 났으나 첫 경험으로 치부했다. 왼쪽 어깨가 아픈 게 심상치 않았다.

  삼 주일가량 지나자 감자 싹이 올라왔다. 점점 싹 자리의 비닐이 탱탱해지면서 오줌이 찬 아이 고추처럼 여기저기서 불거져 올랐다. 곧장 비닐을 뚫고 거침없이 터져 나올 기세였다. 여리 디 여린 어린 생명이 가진 힘은 무한대 같았다. 비닐을 칼로 살짝 찢어서 감자 순을 내주었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가 지고나면 밤꽃과 아카시아가 다투어 필 것이다. 앞 산 솔밭에는 벌써 송화가 눈보라처럼 날렸다. 옛날 보리타작과 감자 캘 무렵이 생각났다. 이때가 보릿고개의 마루턱이었다. 나는 감자 밭 둔덕에 앉아 모내기를 앞둔 간사지 논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월에 접어들자 잡초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감자밭은 일주일 방심한 사이에 심각해졌다. 잡초가 어리고 땅이 말랑말랑할 때는 재미삼아 뽑아주면 그만이었다. 오월 한 달을 매주 거의 두 번씩 내리는 비에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제초제만 사오슈. 마세트란 게 있는디, 내가 뿌려줄테니께유.”

  잡초 서슬을 알아차린 옆집 배 선생이 몇 번 나에게 권했다.

  “그럴까예. 알겠십니더.”

  막상 대꾸는 했으나 탐탁치가 않았다. 주위에는 쓰고 버린 농약 병이나 제초제 봉지가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었다. 제초제로 노랗게 말라 죽어 있는 밭둑은 볼썽사나웠다.

  “맨날 마늘, 파, 생강... 마늘, 파, 생강, 이거여.”

  “다들 나갈려구머 허는디.”

  언젠가 버갯속 영감이 말했다. 말하자면 개미 쳇바퀴 같은 우리 농촌이다. 나갔던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와야 한다. 어설픈 웰빙 바람은 먹고 노는 쪽이라 역겹다. 아무데나 붙이는 친환경 구호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겉돌고 제대로 안한다.

  배 선생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초제 살포를 부탁하지 않았다. 이웃사촌이라 부르는 연장자의 성의를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보라색 감자 꽃이 필 때까지 반응이 없자 배 선생은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배 아주머니가 집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감자밭이 사납네유. 모기도 엉기구, 파리도 끌코유. 저리 두머 온 동네가 지저서...”

  마디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있었다. 아주머니 말마따나 갈수록 감자밭은 사나웠다. 바람에 날아간 비닐을 다시 씌우는 사이에 온갖 잡초 씨가 날아들었다. 이것이 잡초 소굴이 된 결정타였다. 동네방네의 파리와 모기를 꼬이게 하고 사방팔방을 푸새 밭으로 만든 원죄를 내가 꼼짝없이 뒤집어쓸 판이었다. 

  잡초는 감자를 캘 때 단연 존재를 확인시켰다. 그러고 보니 덩치부터 다른 옛날에는 없던 잡초들이었다. 수입 가축사료에 쓸려 들어왔다고 한다. 고목같이 어세 밑동을 자르기도 힘들었거니와 비닐을 걷어내는데 뿌리가 휘감겨서 애를 먹었다. 이래저래 감자 농사 후유증은 그대로 남았다. 왼쪽 어깨는 물리치료를 받았으나 그 때 뿐 풀리지 않았다.

  첫해부터 나는 잡초에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년 감자 농사는 고려해 보기로 했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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