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31화) '뿌리를 뽑아야 돼!'

 

31.

 

 

첫 보고회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에이플랜 팀은 24시간 풀 가동체제로 돌입했다. 나는 할 일이 있었다. 첫째, 이희종 CU장에게 보고 내용의 구성을 설명하고 튜닝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보고자를 확정하는 일이다.

 

 

매킨지의 후지모토와 회장실의 하희조 부장과 함께 나는 CU장실에 들어갔다. 사안에 따라 미묘한 부분에 대해서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CU장의 의견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에이플랜 팀의 실질적인 첫 작업인 < 12개 주요사업의 활성화 > 프로세스는 9월부터 12월 말까지 일정이다. 이번 <에이플랜 스티어링 커미티>에서 보고는 < 12개 사업의 진단 >을 통해 전략적 과제를 파악하는 단계에서 첫 중간보고다.

 

에이플랜 팀이 구성되자마자 자체 교육, 각 사업부장, 실무 부 과장을 대상으로 워크샵과 고객 모니터, 경영회의 멤버들의 개별면담, 4사 사장들의 개별면담이 진행되었다. 별도로 중복사업의 개별 워크샵도 병행했다. 동시다발의 작업에 회사 전체는 요란했다.

 

 

 

나는 이희종 CU장에게 중간보고의 욧점을 간단히 설명했다. 

 

“ 어떤 일이든 첫 단추가 중요해. 현상 파악이 제대로 돼야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어.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제기해봐. ”

 

CU장은 첫 보고회부터 고삐를 당기며 기대를 걸었다.

 

“ 되풀이해온 일, 잘 아는 사실을 새삼스레 제기하자니 더 힘듭니다. ”

 

에이플랜 팀으로서 보고회를 앞둔 일반적인 정서를 내가 대변했다.

 

“ 무슨 소리야. 맞을 매는 맞아야 돼. 아직도 개선이 안됐다는 건 자극이 없었다는 이야기지. ”

 

“ .................... ”

 

“ 몰라서 안 하나 안해서 못한 거지. 모든 게 실행이야 실행! ”

 

“ 털어내고 알려서 현상을 공유하는 단계입니다. 한달 여 사업부나 저희들 고생 많았습니다. 현장을 윽박지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많은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이번엔 격려 쪽으로 힘을 실어주십시오.”

 

“ 뿌리를 뽑을 땐, 뽑아야 돼. ”

 

단호함이 묻어나왔다.

 

그동안 수시로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튜닝이라 해서 유의할 의견 제시는 없었다.

 

 

 

이번 보고는 내가 담당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보고 전부를 내가 직접 보고할 것으로는 생각하질 않았다. 첫 보고이니만큼 팀장이 해야한다고 후지모토가 주장했다.

 

서두의 총론 부분은 내가 전개하더라도 박진홍 서브팀장과 한창진 정도로 나누어 브리핑하는 편이 내용 전달 면에서 나은 측면도 있었다. 나는 매킨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보고 내용을 45개의 SPG를 10개 서브 팀으로 나누어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다. 두 세 멤버가 한 팀이 되어 서너 개 사업을 맡았다. 

 

나는 수시로 각 팀의 진도를 파악하면서 채린지를 했다. SPG별로 보고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포함 여부 숫자를 조정했다. 엘리베이터 사업에도 에스컬레이트와 보수가 있고, 송배전기기 사업에는 범전기기, 고압기기, 초고압, 그리고 변압기가 있다.

배전반, 자판기, PLC, 공정제어, 빌딩제어 시스템과 CNC, 로봇 등 자동화기기, 전동공구... 산전 CU 4개사의 45개 사업 내용은 간단치가 않았다.

 

갈수록 세부적으로 파악해야할 숙제가 불어났다. 10여 년 회사업무를 수행하면서 통상적으로 접해온 45개 사업에 관한 지식은 상식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지금까지 브리핑 스틱을 들고 전사적으로 이런저런 보고를 담당해왔으나 이번 보고는 전혀 개념이 달랐다. 적어도 2백여 쪽의 분량은 각오해야 했다. 줄여도 분량이 너무 많았다.

 

서브 팀별로 불러 함께 논점을 토론하고 요점을 정리해갔다. 핵심 위주로 내가 직접 장표를 그려가면서 합할 건 합하고 버릴 건 버렸다. 나중에 보면 줄기는커녕 늘어났다.

 

줄이기 어려운 게 보고의 장표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각 팀 별로 땀 흘려 한 작업이라 제외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에이플랜 팀의 사기를 생각해서 안타까웠다. 과감하게 취사선택의 용기가 필요했다. 

 

 

 

보고회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집 <가가호호> 팩스도 불이 났다. 밤사이에 수십 장의 팩스가 줄 이어 거실 바닥에 길게 널어졌다. 멤버들과 저녁 늦게까지 토의를 한 후 내가 집으로 오면 그동안 보완을 해서 만든 장표를 밤중에 우리집으로 팩스를 넣었다.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수정된 내용을 점검하고서 출근했다. 출근하자마자 곧장 재차 수정할 수 있으므로 실무자들의 작업을 마무리하는데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2년 전, 역시 매킨지와 OVA를 수행할 때 터득한 패턴이었다. 멤버들은 힘들어 했지만 신속한 의사결정 스타일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빠른 의사결정이 오히려 힘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우리 에이플랜 멤버들은 뜬눈으로 날밤을 샜다. 인근 여관에서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출근을 하기도 했다. 뒤에 일이지만 대방동 인근에 장기적 계약으로 숙소를 마련했다. 

 

첫 보고회를 앞둔 팀으로서 며칠간은 결전을 기다리는 숙명의 시간같았다. 

 

 

 

 

보고회는 세 시간의 계획이다. 두 시간 보고하고 한 시간 토의할 예정이었다. 다소 건너뛴다 하더라도 두 시간에 OHP 2백 여 쪽의 분량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방대한 자료를 두 시간에... 나로선 첫 경험이었다.

 

보고회 전날 연습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사내 보고를 앞두고 실전처럼 예행연습을 한 적이 없었다. 내용을 혼자서 마음속으로 정리한 후에 실전에 임하곤 했다.

 

계전 심사부장 시절 <NBP 프로젝트>, 매년 연동해서 수립했던 <금성계전 5개년 장기 경영전략>, 임원이 되고 나서 <산전CU OVA 프로젝트> 등 전사적인 혁신 프로그램을 추진할 때 그랬다.

 

종전처럼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매킨지 친구들이 반드시 연습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하는 수 없이 이것도 내가 졌다. 

 

2백 쪽에 달하는 내용을 당일 앉은 자리에서 피보고자인 스티어링 커미티 멤버들이 이해할지 미지수였다. 내용 전달이 빠르게 정확하게 충족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예행연습은 중요한 과정이었다.

 

연습에 돌입하니 만만치가 않았다. 중간 점검으로 내용을 파악했지만 많은 분량이 뒤섞이다보니 헷갈렸다. 새로운 어프로치와 용어로 정립한 패턴이 보고자건 피보고자건 피차 생소해 혼란스러웠다. 

 

 

 

 

에이플랜 팀의 업무속성상 시간이 갈수록 PC 타이핑 작업이 늘어났다. 김미숙이 혼자 담당하다가 인력을 보강하여 박정아가 신입사원으로 추가 투입되었다. 특히 보고회를 코앞에 두고 PC 작업량이 가중되었다. 

 

매킨토시 등 최신제품의 대용량 데스크 탑 PC와 초고속 제록스가 무색했다. 원고 타이핑 작업 순서를 기다리며 북새통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워딩 작업은 몇 번이고 고쳐 정확도를 올려야 했다.

시간을 다투어 수정해야 할 원고가 팀별로 수시로 쏟아졌다. 보고 장표의 마무리를 위해 서브 팀별로 질적인 측면에서 보이지않는 경쟁이 있었다.

 

 

 

김미숙과 박정아도 트윈타워 서관 24층을 나서 퇴근해야 퇴근 하는 비상 근무에 들어간지 오래다. 집에서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여사원의 부모에게 인사담당을 오래한 나로서도 일찌기 전례가 없었던 <야근 확인서>를 써서 들려보내기도 했다.

 

 

 

서로 자기몫을 먼저 정리해달라고 여사원에게 부리는 남자의 애교는 보고회를 앞둔 막바지 긴장감 속에서도 따뜻하게 정감이 흘렀다. 여사원의 지루한 PC 작업에 에이플랜 팀 멤버들은 나름대로 묘안을 짜냈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옆에 다가앉아서 알아보기가 어렵게 후려쓴 글씨를 짚어가며 한자 한자 읽어주기도 했다. 미리 먹을 것 마실 것을 미리 사들고 와서 자기 차례를 느긋하게 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박동원은 출장 갔다오면서 만화책을 사다주고 역사소설을 소개해 주었다고도 말했다. 최공범은 졸음을 참느라 쫒느라 때로는 외설적인 가십꺼리로 웃겼다는 자신만의 비책을 공개하기도 했다.

늦은 시간에 여사원을 승용차로 집에까지 태워준 이야기를 집사람한테 아무 생각없이 했다가 부부싸움까지 했다며 이희양이 너스레를 떨었다.

 

12명의 에이플랜 팀이 수시로 쏟아내는 일감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비서 김희장을 비롯해 두 여사원의 순발력이 남달랐다.

 

 

 

 

회의실에서 붙박이로 앉아서 서브팀장인 박진홍이 일본말을 번역하거나 우리말 표현으로 순화 교정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번역과 공통언어 작업의 총책은 박진홍 몫이었다. 원고 내용을 지적해가면서 때로는 즉석 토론으로 이어졌다. 왕도가 없다는 원고의 교정은 남이 거들어주어야 그나마 완벽했다.

 

보고서 원고를 여러사람이 만들다보면 멤버들에 따라 구사하는 단어나 용어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어색한 낱말은 순화시키고 뉴앙스가 다른 표현은 하나로 통일시켰다. 나는 '공통언어 작업'이라 불렀다.

이 작업은 에이플랜 팀의 중요한 기능이라 생각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회사 한 솥밥을 먹으면서 말이 안통해 통역이 필요할 때가 흔히 있었다. 

 

 

 

 

최종 장표 내용은 내가 'OK' 표시를 함으로서 마무리가 되었다. 수정과 수정의 연속이었다. OK된 장표는 페이지를 매기면서 프린터에 들어갔다. 프린터에서 나온 자료는 순서대로 묶어서 바인딩을 했다.

 

에이플랜 팀 보고서 특유의 감청색의 표지를 앞뒤로 대어 제본을 했다. 감청색은 그 이후 에이플랜 보고 자료의 표지색으로 굳어졌다. 제본 작업에 대여섯 명이 달라붙었다.

바인딩 패키지 작업 과정을 에이플랜 팀에서는 '패키지 공장’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공장 생산현장에서 출하되는 제품과 같아서 보고회 최종 패키지가 에이플랜 팀에겐 하나의 제품이다. 스티어링 컴미티 멤버들에게 나누어줄 보고서 하나하나에 제품 번호에 해당하는 대외비 관리번호를 매기면 ‘공장 작업'은 끝이었다.

 

 

철저한 공정관리에도 불구하고 바인딩을 한 후에 수정사항이 떴다. 바인딩을 풀어 다시 끼워 넣는 일은 성가셨다. 공장 작업에서 한 글자 오자 탈자도 제품으론 불량이다.

패키지 공장 작업은 허드레 일이라 젊은 축에 드는 멤버들이 자청했다. 자기 책임의 원고 작업이 끝나면 여기에 자발적으로 끼어들었다.

 

 

자르고 붙이고 떼고 갈아 끼우는 일은 이제 에이플랜 팀에게는 기본기였다. 책상 밑에는 구겨버린 종이 조각들이 어지럽게 쌓였다.

 

매킨지 친구들은 수정사항이 있으면 휴대하고 있는 쬐끄만 접착 테입을 눌러 붙여 깨알같은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수정을 했다.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모양이 자연스러워 매킨지의 프로다운 면모와 일본인다운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야말로 온통 북새통이었다. 이런 패턴은 5년 동안 예외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런 가운데 '패키지 공장'에서 수많은 보고 자료는 에이플랜 팀이 보증하는 제품으로 탄생되었다.

 

 

<사업 활성화를 향한 신체제 확립을 위하여- 제 1차 중간보고>.  보고회는 사흘 뒤 11월 8일 오후 3시부터 세 시간이었다. 두 시간은 장표 중심으로 OHP 프로젝터로 설명하고 다음 단계를 위한 <결정요망 사항>에 대해 토의하는 것으로 구성했다.(31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