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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59화-1) "할 말이 있습니까?"

 

59-1

 

 

산전CU의 생산 제품군은 갈수록 늘어나 매출이나 이익구조에서 천차만별이다. 통상적인 눈으로 보면 지속해야 할 사업은 몇 개 안된다. 산전은 문을 닫아야할 회사다.

 

 

여간 뚝심이 있고 강심장 사장이 아니면 헤쳐나가기 힘든 회사다. ‘산전의 이해’가 없이는 불안한 회사였다. 

 

 

금성계전은 74년 6월 설립되었다. 윤욱현, 이헌조, 구두회, 윤욱현(중임), 최선래. 김영태, 최근선, 백중영, 성기설이 사장 또는 부사장을 역임했다.

 

금성기전은 78년 5월 서통전기를 그룹이 인수하여 신영전기, 금성기전으로 상호 변경이 있었다. 구자두, 홍종선, 구자원, 김회수 사장으로 이어졌다.

 

금성산전은 87년 3월 설립되어 현재 산전CU장으로 이희종 사장이다. 10년 가까이 재직은 드문 일이다.

 

 

 

 

“ 적자회사를 만들고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

 

“ 회사를 이 모양으로 해놓고 경영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 있는 임원들은 그 동안 뭘 했습니까? 다들 죄인입니다. ”

 

방금 전임 사장이 이임 인사를 끝내고 이어 단상에 오른 후임사장의 취임 일성이다. 전임 사장은 윤욱현 사장이고 신임사장은 최선래 사장이다. 

신임 사장의 취임사는 ‘점령군 계엄사령관의 담화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선 사람을 겨냥한 비수와 같았다. 죄인으로 남아있는 임직원 모두를 겨냥했다. 신임 사장은 계전의 지난날을 현재의 논리로 간단히 재단했다.

 

후임사장의 ‘담화문’을 선임사장은 경청했다. 자세를 허트리지 않고 꼿꼿이 앉은 모습에서 의연함이 돋보였다. 큼직한 눈 만 껌뻑껌뻑 할뿐이다. 경륜이 있는 풍모였다. 윤 사장의 두 눈에 비치는 황소의 눈물을 나는 보았다.

 

윤 사장은 금성계전을 만든 분이었다. 초대사장을 역임한 뒤 두 번째로 제3대 사장에 다시 부임했다. 드문 일이다. 초고압 투자의 뚝심 또한 대단한 일이었다.

 

최 사장은 배려하는 리더의 모습은 아니었다. 경륜의 소산임을 증명하듯 오히려 윤 사장이 인내로서 배려를 하고 있는 셈이다.

 

 

 

1982년 2월, 최선래 사장과 김영태 부사장이 금성계전으로 함께 부임할 때의 이취임식장의 모습이다. 최 사장은 금성사의 부사장에서 김영태 부사장은 기획조정실 전무에서 각각 승진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사장과 부사장이 사내 승진이 아니라 동시에 부임한데다 승진 이동이었다. 상대적으로 조직 분위기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5공 전두환 신정부가 들어서고 제2차 오일 쇼크 직후였다. 정치적인 변화에 대기업의 충격도 뒤따랐다. 계전의 초고압사업이 중화학 정책 기조의 한 분야인 중전기 사업에서 효성전기와 사업조정이 대두되었다.

 

이미 오산공장 154kv 초고압 단락시험 설비에 투자된 70억 원이 기약 없이 하루 아침에 갇혀버렸다. 자금 사정 악화로 25%의 고금리를 견디다 못해 12억원의 첫 적자를 기록하였다.

 

81년 가을 어느날, 그룹 회장의 지시로 기획조정실의 특별 감사반이 투입되었다. 윤욱현 사장의 방만경영이라는 테두리에서 먼지를 털었다. 석 달동안 극동빌딩 본사는 물론 오산공장, 청주공장을 오가며 내린 감사의 결론이 최선래 사장과 김영태 부사장 팀을 불렀다.

 

금성계전은 럭키그룹 내에서 크진 않지만 잘 나가는 회사였다. 전화기 만드는 금성통신에서 시작한 전력량계( WHM ), 범전품인 개폐기와 차단기 사업을 분리하여 금성계전을 만들었다.

70년대 고도 성장기에 편승하여 정부 관납에다 대형 건설업계 위주의 매출로 기복이 없고 수익이 좋았다.

 

 

럭키그룹의 창업회장 중에 한분인 구두회 사장이 2대 사장으로 거쳐갔다. 창립 초창기 회사가 그러하듯이 오너 중에 오너인 구 사장의 부임에 종업원들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덩달아 신바람이 일었다. 금성계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회사 창립 10년 만에 닥친 최선래 사장과 김영태 부사장을 '점령군'이라 불렀다. 기세는 살벌했다. 심리적인 공황은 심했다. 잘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적자회사, 몹쓸 회사로 전락해버렸다는 낭패감이 엄습했다.

(얼마 후, 전임 윤 사장 때 세운 당초 82년 430억 원 매출목표는 387억 원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전년 적자 12억 원을 올해 흑자 8억 원으로 반전시키는 수정 사업계획이 수립되었다.)

 

 

 

취임식 다음 날 관리자 회의에서 최선래 신임사장의 첫 ‘긴급조치’가 선포됐다.

 

 

'포고령 제1항'은 아침 여덟 시 출근에 밤 열시 이전에는 퇴근 불허였다. 열 시가 되었다고 퇴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퇴근은 없고 출근만 있었다.

 

화장실 두루마리 한 개도, 모든 전표는 부사장까지 올려야 했다. 해외출장 불허다. 투자 동결이다. 교제비와 접대비 지출은 일체 중지되었다. 사실상 교제비와 접대비의 일정부분은 복리후생적인 면도 있었다.

 

퇴근하면서 청계천 '락가', '이카스'는 물론, 충무로 3가 뒷골목 동아상사 골뱅이에 병맥주 한잔 없는 삭막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일 년여 전 79년 5월, 금성계전에 과장으로 입사하였다. 기업에서 전개되는 전혀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임 사장의 면전에다 ‘적자회사를 만들고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는 후임 사장의 일갈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임직원들이 늘어선 극동빌딩 17층 회의실 이취임 식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명색이 초대사장이다. 그룹 전문인 사장단을 통틀어 고참 사장이었다. 드물게도 영어를 잘 해 럭키그룹에서 브레인의 한 사람으로 해외사업 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칭송받는 분이다.

 

‘신탁통치’의 밀명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었다. 점령군의 서슬 아래 어느 누구의 원군도 없었다. 나에게 충격으로 남았다.

 

 

 

이것이 점령군의 시발이었다. 외인부대의 첫 장이 열린 역사의 의미를 나중에 알았다.

 

최선래 사장 후임으로 85년에 최근선 사장이 부임했다. 금성사 부사장에서 승진하면서 부임했다. 사장은 아니지만 84년에 지금 LG건설 사장인 민수기 이사가 럭키에서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계전으로 왔다.

87년, 이희종 사장이 금성사 부사장에서 승진하면서 산전의 사장 겸 섹터장을 역임하고 CU장이 되었다.

 

 

(94년 말에 LG전자에서 왔던 이종수 부사장이 95년 김회수 사장이 물러난 기전 사장으로 승진한 뒤 다음 해 이희종 CU장 후임으로 산전, 계전, 기전 <3사통합 산전>의 CU장이 되었다.)

 

(95년의 LG상사에서 온 장병우 전무는 다음 해 승진을 시켜주는 조건으로 산전에 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소문대로 이듬해 부사장이 되었다. 98년 말에 손기락 인화원 부회장이 LG화학의 김정만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과 동반해서 산전CU장으로 왔다.)

 

 

 

 

 

하나같이 승진이었다. 그 때마다 산전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걸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룹내에서 공공연히 산전은 문제투성이 회사로 치부되었다.

 

 

승진에도 불구하고 전임 회사에서 전출되어온 사실을 ‘내가 밀릴 사람이 아닌데...’, ‘하필 산전이야?‘라고 하는 둥 산전의 정서와는 달랐다. 회사 인생이 산전에서 끝난 것처럼 오해를 낳기도 했다. 올 때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왔다는 말이 돌았다.

 

 

 

 

급기야 '우리 회사는 철새 도래지'라며 스스로 비하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사원들의 판단은 과격했으나 옳았다. 사원들의 눈은 밝았다. 입은 만 개이지만 눈이 2만 개였다.

 

 

 

“ 전임자 욕하는 사람 치고 나중에 욕 안 들어먹는 사람 못 봤어. ”

 

“ 그런 이유가 다 있었어. 지금의 잣대로만 재서는 안돼. ”

 

 

“ 졸업 여행한다고 하데요. 한 달이 멀다하고 중국 갔다 미국 갔다 요사이 부쩍 나다니시는 걸 보면 승진은 물 건너갔나 봐요. ”

 

“ 산전에 깃발 들고 온 사람들, 끝날 땐 그 모양이야. ”

 

“ 숫자만 만지던 사람들이 별 수 있어. 제 실속만 차리고... ”

 

 

 

기이하게도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산전은 럭키금성 그룹에서 아웃사이더로 치부되었다. 산전은 덩치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룹에서 네 번째의 크기에 비해 산전의 그룹 내 위상은 평가절하되었다. 산전은 '트윈타워 동관의 어른'들이 보는 그룹의 주력 사업군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희생을 일방적으로 감수해야했다. 산전이 걸어온 20여 년 발자취가 이런 구도였다.

 

 

‘ 왜 산전이 해를 바꿔가며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근본은 다른 데서 흔들어놓고 산전에 물타기를 하는가? 희생을 감수하고 산전의 조직원들만 주눅이들어야 하는가. ’

 

나의 첫 번째 의문이다. 해답은 간단했다.

 

그룹의 잘못된 정책적 판단의 결과를 산전을 통해 희석시켰다. 그럴때마다 산전의 재무적 건전성은 박살났다. 논공행상의 논리인가, 끝내기의 한 수인가, 승진 발탁되어온 임원은 회계 재무 분야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후, 97년 재무구조면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된 럭키금속을 산전에 가져다 붙인 게 결정판이다.) 

 

산전으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외풍에 속수무책이었다. 산전이 전략적으로 그리는 그림과 산전 임직원들의 의도와는 관계 없었다. 정상적인 성장은 불가능했다. 인재가 성장할 토양이 아니었다.(59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