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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93-98 김상무 아리랑(30화) '매킨지는 떠나면 그만'

 

30.

 

 

이희종 CU장이 예고도 없이 24층의 에이플랜 팀 회의실을 불쑥 들어섰다. 팀이 구성이 된지 한 달쯤 되는 9월 24일이었다.

 

나는 회의실에서 매킨지 후지모토와 회장실 멤버들과 화이트 보드를 앞에 놓고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는 참이었다. 산전 팀 멤버들은 대부분 현장에 나가고 서브 팀장 몇명이 남아있었다.

에이플랜 팀은 첫 작업인 < 12개 주요사업의 활성화 > 일정에 매달려 산전, 계전, 기전 3사의 영업과 공장 현장에서 주요사업의 진단에 눈코 뜰새 없었다.

 

초가을에 접어들었다곤 하지만 트윈빌딩 24층은 더웠다. 남향이라 한낮에는 공조시설에서 초 인텔리전트 빌딩이라는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후끈거렸다.

 

 

갑자기 CU장이 회의실에 나타난 것이다. 노타이에 와이셔츠 소매를 둥둥 걷었다. 모두들 갑작스런 CU장의 출현에 놀랐다. 나는 일어서서 목례를 했다. 나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멤버들을 나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도록 했다.

CU장도 손사래를 하며 하던 회의를 진행하라는 표시를 했다. CU장은 창가쪽 가장자리의 빈 의자에 앉았다. 토의는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CU장은 묵묵히 참관했다. 잠깐 사이에 CU장은 무언가를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집어 만지작거리며 훑어보고 있었다.

에이플랜 팀의 저금통이었다. 마분지로 만든 간이 저금 상자 안에는 천 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에이플랜 팀 모임에 지각을 하면 자진해서 넣는 벌금 통이었다. 10분에 천 원씩 오천 원이 한도였다.

 

 

 

한동안 듣고만 있던 CU장이 드문드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CU장까지 가세한 토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 월말, 분기말, 년말에 생산 편중... 소나기 출하...  공장의 문제라기보다 실은 영업의 문젭니다. 생산평준화는 수주 평준화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시계업체 SEIKO는 졸업, 입학, 결혼 시즌에 많이 팔린다는 고정관념과 다르게 바캉스 시즌에도 잘 팔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광고와 신제품 출시를 7, 8월로 해서 기획생산을 하므로서 영업 평준화를 도모했어요. "

 

" 문제점을 알면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풍토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거짓 데이타가 나오면 결국에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위에서 목표달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들통이 납니다. " 

 

CU장도 한사람의 토론 멤버였다. 격의가 없었다. CU장의 견해를 경청했지만 우리 멤버들의 소신 피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토론은 두어 시간여 계속되었다. 비서 미스 최는 바로 한 층 아래 에이플랜 사무실에 CU장이 내려온 줄을 모르고 행방을 찾느라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나는 이희종 CU장을 배웅하면서 한가지 부탁을 했다.

 

“ 언제 저희들 전체 모임에 다시 한번 오시죠. ”

 

“ 초청한다는 건가? ”

 

“ 예, 초청이라면 초청입니다. ”

 

“ 그럼 날짜를 잡아 봐. 멀리 미룰 거 있나. ”

 

“ 10월 14일의 저희 팀 정례 미팅이 있습니다. 그 날로 하시죠. ”

 

첫 보고회를 앞두고 중간 과정을 점검하기로한 에이플랜 팀 전원 미팅 일정이 있었다. 에이플랜 팀 전원이 CU장과 자연스럽게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CU장은 수첩을 꺼내 약속 날자와 시간을 적었다.

 

 

CU장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혼자 웃었다. 내가 에이플랜 팀을 맡기로 결정한 다음날인 8월 12일을 생각했다. 에이플랜이 기안하는 서류는 중간 결재 단계를 없앤 ‘직거래’를 요망하면서 내가 요청한 사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 에이플랜 팀은 사장님의 관심을 먹고 살겠습니다. "

 

" 응. 알았어. 김 이사 말 알어. "

 

 

관심. 가끔 오셔서 격려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막상 오늘 이렇게 불시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10월 14일은 두 주일 전 약속한 CU장과의 시간이다. 전날 비서를 통해 확인하면서 에이플랜 팀으로 직접 오시게 했다. 납선에 납기관리 하듯 스스로 시간에 맞춰 오는 분이었다.

 

이날 산전의 멤버 13명, 회장실의 멤버 3명, 매킨지 멤버 4명 등 20명 전원이 모였다. 좁은 회의실이 초만원이다.

시간이 되자 헐레벌떡 트윈타워 동관 사무실에서 아카바까지 뛰어왔다. 아카바는 나를 쳐다보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CU장이 연거푸 두 번이나 찾아와 준 자체를 놀라워 했다. 이희종 CU장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해 하면서 흡족해하는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탑 매니지먼트의 행동 하나하나를 매킨지에 대한 신뢰 여부로 연결시키는 모습은 전형적인 탑 세일의 매킨지 특유의 기업문화로 이날도 유별났다. 

 

 

 

“ 매킨지 쇼크라는 말을 들어보았어요? 일본의 '후지덴키'가 매킨지 컨설팅을 받고 그 후유증을 아직도 극복을 못하고 있습니다. '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

 

CU장의 첫 마디가 의외였다.

 

“ 통합작업하는 과정에 잘못되면 그 여파는 오래 남습니다. 우리 산전 팀에게는 여러번 당부를 했습니다. ”

 

처음부터 '매킨지'라는 말이 연달아 나오자 매킨지 멤버들의 표정은 아연 긴장했다. 박진홍이 아카바와 후지모토 사이에 앉아서 조용조용히 말과 필기로 즉석 통역을 해주고 있었다.

 

“ ‘매킨지는 의사이자 가정교사이다. 몸둥아리는 내 것이다. 건강진단 하듯이 의사는 검진 결과를 제시할 뿐이다. 그들이 모든 걸, 끝까지 남아서 우리의 장래까지 책임을 져주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 임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매킨지에 대한 경고로 나는 받아들였다. 후지전기나 옴론의 실수나 실패를 우리 산전에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였다. 한편으로는 에이플랜 팀에게 거는 기대이기도 했다.

 

“ 문제는, 이로쯔께, 다시 말해 컬러링(colouring)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

 

아카바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표정이 굳어졌다. CU장은 산전 에이플랜 팀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한사람 한사람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 우리가 사업을 왜 하느냐? 사업을 하는 이유와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래옥(又來屋)에 가보면 가업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몇십 년을 대를 물려서 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갑니다. 맛있는 불고기와 냉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편하게 해줍니다.

고객이 찾아오도록 아이디어를 내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업도 리프레시가 필요합니다. 사업이 고정관념, 권위의식에 빠지면 망합니다.

 

우리 엘리베이터도 돈을 벌 때 투자를 해야 합니다. 신사업, 신제품에 투자를 해야하는데 못사는 동생들 때문에 형님이 제 갈 길을 못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업을 종합적으로 신랄하게 한번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동시 통합이냐 단계적 통합이냐를 두고 생각했습니다. 통합방법도 선 통합 후 정지작업이냐 선 정지작업 후 통합이냐, 또 아니면 단계적 통합이냐 등 세 가지 방법론이 있습니다.

 

나는 과감히 전자를 택했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시너지가 나는 조직문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증폭이 되기 쉽습니다. 선 통합 후 조정을 하는 편이 선 정지작업 후 통합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얼마간의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걸 미리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先공개 후 합병을 하고 조직은 동시에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통합의 여정에는 강한 힘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업 내용도 복잡하거니와 그에 따른 기술과 자본의 합작선도 회사마다 다 다릅니다. 미묘한 이해관계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제각기 안고 있습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습니다. 큰 것을 얻으려면 작은 건 희생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거저 생기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작용이 두려워 우리가 응당해야 할 행동을 게을리한다면 훗날 우리의 후배들로부터 질타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

 

선 통합 후 정지작업은 조직 풍토와 합작선과의 관계 등을 고려한 통찰력의 산물이었다. 이희종 CU장의 강한 추진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시기와 방법을 담보로 할 수 없다는 강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특히 임원들이 이럴 때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장서서 자기 조직은 자기가 이끌어야 합니다. 조직 내에 정보를 피드 백 해주거나 분위기를 전달할 때 서툴러 문제가 생겨요.

 

임원이면 정보의 전달을 잘해야 합니다. 단세포 같이 상황과 분위기를 자기류(自己流)로 해석해서 조직 내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단세포', '자기류'는 산전CU의 동질문화를 강조하면서 이희종 CU장이 최근들어 자주 사용해온 단어다. 임원들이 사원이나 관리자들에게 사업을 통합하는 대의명분을 잘 전달하라는 당부 끝에 나오는 말이었다.

 

누구나 쉽게 빨리 공유할 수 있는 조직 내부의 '공통의 언어'가 미흡함을 이렇게 지적했다.

 

 

 

 

“ 최근에 합작선과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약간의 말들이야 있겠지마는 잘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전의 후지 지분은 30%입니다. 동업관계를 청산할 것이냐 통합 후에도 자본 참여를 할 것이냐 인데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리라 전망합니다.

기전은 미쓰비시가 12%입니다. 이미 통고를 완료했습니다. 동의 여부는 별도 기회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웰은 90년대 말까지는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하니웰도 하루 빨리 합쳐져야 합니다. “

 

 

외국 자본인 합작선의 처리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어쩌면 이희종 CU장이 주도하는 이번 통합작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산전과 기전의 엘리베이터 사업에서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계전에서는 후지전기가 상대였다. 히타치와 미쓰비시는 금성사 등 그룹 내 주력회사들과 여러 사업이 연결되어 있어 그룹 차원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나나 매킨지 멤버들이 머리를 싸매고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3사 통합과정에 에이플랜 프로젝트가 거쳐야 할 난제 중에 난제였다. 산전CU의 임원이나 관리자도 합작선의 동향을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CU장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합작선 관계에 진척이 있음을 오늘 처음으로 내비쳤다. 갑갑하기만 했던 마음 한구석이 이 부분에서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맛보았다.

 

 

 

 

“ 지금의 사업부장들은 임원이라기보다 대(大) 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도 두 개는 해야 하고 외국에서 근무경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업부장을 재교육해야겠습니다. 발탁인사도 하겠습니다.

 

95년에 통합이 되면 신체제가 소프트 랜딩을 하도록 에이플랜 초기에 프레임을 잘 짜 주기 바랍니다. 산전이 갈 길은 이것입니다. 인재를 기르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도 큰일입니다.

 

에이플랜은 사업가를 길러내는 프로젝트입니다. 단순히 3사 통합 작업만이 아닙니다. 장래의 후계자, 사업부장들을 길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플랜 팀 여러분들이 스스로 인재가 되어주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경험이 인재가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나는 ‘에이팀 인재’라 부르겠습니다.“

 

 

 

에이플랜 멤버들은 고무되었다. CU장은 확실하게 에이플랜 팀에게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에이팀 인재’ 라는 표현이 더더욱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 김 이사. 이번 통합작업은 공부도 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자질도 높이고... 그런 좋은 기회야. ”

 

에이플랜 팀 인원 구성을 협의할 때 CU장이 스쳐가듯이 한 말을 떠올렸다. 한 순간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에이팀 인재'.

 

 

 

 

오늘 이희종 CU장이 몇번 거듭한 '에이팀 인재'라는 표현은 CU장이 에이플랜 팀에 거는 기대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에이팀 인재육성'은 이희종 CU장의 3사 통합작업을 향해가는 미래형 화두이자 에이플랜 팀 리더로서 나의 현재 진행형 과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희종 CU장의 에이플랜 팀 오늘 방문을 매킨지 친구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아카바를 비롯한 매킨지 멤버들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커미트먼트였다고 반색했다. (30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