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귀촌하신다구요?

귀촌일기- 도내 간사지와 통일벼






 ...영감은 자세를 고추 세웠다. 이 쯤 되면 영감의 머리는 씨줄 날줄 얽인 과거사가 빠르게 줄을 섰다.  

  “조, 간사지가 일백오십 정(町)이여. 원뚝 길이가 육백 오십 메타구.”

  육백 오십 미터의 제방 안에 백 오십 정보(町步)의 논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저 길쭉하고 넓디넓은 논으로 만 봐왔다.

  “조기 조, 저수지 말이여. 거진 삼만 평이여.”

  삼만 평이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집에서 내려다보면 일 년 내내 그대로였다. 모내기철에는 양쪽으로 난 수로로 논에 물대기 바빴다. 한꺼번에 물을 빼도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간사지 사이로 길게 뻗은 저수지를 보며 버갯속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가. 언제나 한결같은 저수지에 변하는 건 사람이었다.  

 

  저수지는 해 질 무렵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한낮에는 있는지 없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밀려오면 남쪽의 전망은 달라진다. 굵게 땋아놓은 동아줄이 어느새 이순신 장군이 쥔 큰칼로 바뀐다.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면 역광(逆光)에 꿈틀거리는 은빛 물비늘이 간지럽다. 보글보글 끓는 듯, 송사리 떼가 요란하다. 거실에 기대앉아 보노라면 온 몸이 한없이 잦아든다...

 

  나는 이 조망을 우리 집에서 제 일경(第 一景)으로 친다...




12년 전 내가 쓴 '귀촌 정착기'

<버갯속영감 교유기>의 한 대목이다.






40만 평의 도내수로 앞뜰은

가로림만 바다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사지다.


28년동안 이장으로 재직했던

'버갯속 영감'이 주도했던

간척 공사였다.

 

그 해가 1975년

'박통' 시절이다.


나락 한 줄기에 80알 열던 시절에

200알이 열렸던 기적의 볍씨.


이른바 '녹색혁명'의 신품종

'통일벼'가 자랐던 곳.


통일벼는 1972년 개발되어 

1992년 정부수매가 중지되기까지

논자락 하나 없는 바닷가에

쌀밥을 먹게 해주었다.


  






 한때 양수장으로 사용했던

펌프 시설이 무슨 영문인지

놀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이 이젠

나의 산봇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