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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귀촌일기- 황성 옛터...나고야성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 만 고요해...


들려오는 대금 가락은 분명

'황성옛터'였다.


역사 탐방을 온 우리나라 학도들이 있어 일행 중에서

누군가가 연주하고 있었다.


나고야성.


지금은 월색도 없는 폐허.

황성옛터였다.


무너뜨리고 무너져 내린 

성터.


바로 코 앞의 '가카라지마'를 지나 쓰시마 바다,

눈 길 아련히 대마도가 보인다.

그 너머가 부산일 것이다.


'황성옛터'에 이어 계속된 대금 연주는

'고향의 봄'이었다.


두 곡 모두 적절했다.


나고야성에 오른 우리 사람 치고

두 노래에 담긴 심사를

모를 리 있으리.


'고향의 봄'은 분명

여기에 끌려온 도공들의 망향의 한을

어루만짐이리라.

 







이번 일본 여행에서

꼭 가보기로 작정한 세 곳 중에 하나가

'나고야성'이었다.







나고야성.


나고야(名古屋)의 나고야성(名古屋城)이 아니다.

북구슈 가라쓰(唐津) 인근의 나고야성(名護屋城)이다.


후쿠오카 하카다에서 전철로 한 시간 여면 가라쓰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버스를 타고 다시 한 시간 쯤 가면 요부꼬(呼子)에 닿는다.

요부꼬에서 소형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십 여분 꼬불꼬불 산길을 달리 성하마을(城下町)이 나오고

곧  '나고야 성터'다.





기분이 상그러운 곳이다.


나고야성... 기분 나쁘지만 역사의 현장.

그래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임진왜란의 근거지였다.


왜군 15만 명이 대마도를 지나 조선까지 가장 단거리로,

단 하룻만에 부산에 도착하여 7년 동안

우리나라를 유린하였던 전초기지.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을 위해 50여만 평에 성 둘레 6키로를

1년 만에 축조해냈으며,


자신의 고향인 나고야와 발음이 비슷한 한자인

옛 고(古)를 보호할(護)자로 고쳐가며

굳이 나고야 성으로 명명해 전의를

불태웠던 곳.






                                                                                                                                    풍신수길


                                                                                                                                         이순신





역사는 역사.

과거사를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러나,


임진왜란 3대 대첩인 

내 고향 '진주성 대첩'에서 순절한  대아벌 함성과

강낭콩보다 더 푸른 논개의 충절이

다시금 새로운 것을.


게다가 나고야성 바로 코앞에 있는 섬이

일본에 수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던 백제, 

25대 무령왕이 탄생한 곳으로

가카라시마(加唐島)다.






당시 오사카에 이어 두번 째로 큰,

10만 명 인구가 북적거렸던 나고야 성 마을은

임란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성은 무너졌다.


찬란했던 금빛 천수각도 잔재되었다.


도요토미에 이어 등장한 도쿠가와가

여기를 근거로 도전해 올 다이묘를 우려해

파괴했던 것.


400여 년을 방치되었다가

최근들어 정비 작업이 진행 중이다.


'나고야성 박물관'이 세워지고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으로 기획 전시관이 있으나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해 저무는 성터길은 인적마저 드물어

초겨울 찬바람이 을씨년스럽다.


숙소 가라쓰로 돌아오는 버스 손님은

우리 내외 둘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