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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村漫筆

귀촌일기- 해바라기

 

 

 

 

 

 

 

 

나는 어쩐지 해바라기가 좋다. 호박씨 까듯 톡톡 까는 해바라기 씨가 몸에 좋대서가 아니다. 샛노란 원색 꽃잎하며 둥글넙적한 모양새에 큼직한 키, 모두 맘에 든다.  해바라기를 보고 있노라면 뜨거운 여름날이 되레 시원스럽다.

 

오늘 읍내 나가는 길에 잊지않으려 메모까지 해서 나갔기에 종자 가게에 들러 해바라기 씨를 샀다.

 

올해는 동쪽 밭 언덕바지에 해바라기를 심어보겠다는 생각에서다. 5년 전에 그 자리다. 물건을 놓든 작물을 가꾸든 맞는 자리가 있다. 왠지 그 자리가 해바라기 터로서는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핸가는 해바라기씨를 구하려 종자 상회에 들렀더니 품절이라며 꽃가게에 가보라길래 갔더니 여긴 또 문방구에 가보란다. 웬 문방구냐며 초등학교 앞 문방구를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어린이 학습 교재용으로 두세 알 넣어 한 봉지에 100원 2백원이니 하는데 도무지 심에 차지않아 돌아나온 적도 있다.

귀촌 10년에 해바라기를 심는 시도는 더러 했으나 실제로 해버라기를 심은 건 어느 한해 뿐이었다.  해바라기를 심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 같은데 왠지 연때가 안맞은 것 같다.

 

 

 

 

 

해바라기에 관한 추억이 몇 개 더 있다.

 

'해바라기'라는 영화다.  비또리오 데시카 감독에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는  2차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는 기구한 여인의 순애보이다. 소련 국화라고 상영 금지 딱지를 붙였던 '해바라기'를 시중 일반 상영관에서 상영하기 훨씬 전, 1973년 어느날 중앙청 옆 문공부 청사 시사실에서 특별 관람한 적이 있다.  애절하고 가련한 소피아 로렌의 연기도 연기거니와 광활한 해바라기 화면에 완전 압도되었기에 해바라기 하면 우크라이나 평원의 그 해바라기가 지금도 먼저 눈에 어른거린다.

꽃 때문에 상영 금지라니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 멀어보여도 불과 40년 전의 해바라기 영화 이야기다.

 

 

 

 

 

중학교 때다.  교내 백일장이 있었는데 시제가 '해바라기'였다.

-오늘도 서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남아있는 내 기억으로 마지막 연을 이렇게 끝맺은 내 시는 차상 즉, 2등이었다.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에 지방마다 문화제니 예술제니 하는 행사는 흔하고 흔한 단어가 되었다. 해방되고 6.25 직후 척박한 환경에서 어렵사리 탄생한 진주의 '영남 예술제'는 -지금은 '개천예술제'로 개칭되었다-  지방 문화제의 효시다.  당시 진주에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설창수 선생은 '영남예술제'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그 분의 아들이 나와 동급생이었는데 장원이었기에 내가 한 2등은 어린 마음에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월요일 아침 교정의 조회대에서 교장선생님이 시상을 하시는데 교장선생님의 긴 머리카락 하나가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꼈다.  역광이라 교장선생님의 대머리가 더더욱 눈이 부셨다.  뒤로 남은 몇가닥 쇠잔한 머리카락을 머리 앞뒤 위아래 종횡으로 가지런히 돌리고 '뽀마드'로 조심스레 눌러붙여 애지중지 간수해온 그  머리털이 그날따라 길기도 길었다.  내 시선이 온통 바람에 날리는 머리털에 집중되면서 터지려는 웃음보를 간신히 견뎌낸 그날이 반백 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엊그젠양 생생하다.  해바라기 하면 중학교 때 그 교장선생님이 생각나는 이유다.

 

 

 

 

 

생각의 연줄을 따라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기시작하면 연결의 끝은 한량이 없어라. 올핸 해바라기를 피워낼테다. 동쪽 밭에.  해바라기 씨앗을 뿌리는 하우스 안은 벌써 40도를 웃돈다.  내마음은 여름에 가 있다.  해바라기의 노래가 들려온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 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