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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김상무 아리랑(10화)"어느 놈이 그래?그따위 소릴."

 

 

 

 

10.  

   

 

1993811. 이른 아침부터 푹푹 쪘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출근길에 숨가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따가웠다.

아홉시에 경영회의가 있다. 출근은 했지만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 산전,계전, 기전 3사 통합작업 안건이 오늘 경영회의에서 결판이 난다. 나는 창가로 의자를 돌려 한강을 내려다보거나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사무실은 갑갑했다. 나는 과천에 나가보기로 했다. 특별히 풀어야 할 현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인사업무 담당 임원이므로 대 관공서 업무나 홍보 광고도 내 소관이었다.

나가면 안에 걱정, 회사 안에 있으면 바깥 걱정. “

가끔 나는 이런 농담을 했다어쨌거나 바쁜 게 좋았다.

 

 

 

 

한진형 업무부장이 동행했다. 과천 정부청사는 한가로웠다. 여름 휴가철 풍속도는 관청이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상공부 수송기계과로 가서 몇사람을 만났지만 수인사에 그쳤다. 수송기계과는 산전의 엘리베이터 사업을 다루는 주무 부서였다. 전기공업과도 들렀다. 주문영 과장이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여기저기 뎅그런 의자들로 사무실 분위기는 역시 늘어질대로 늘어졌다.

 

여전히 나의 머리는 무거웠다. 지난 주에 하기휴가를 다녀왔다. 차라리 며칠 더 쉬다 회사에 나올 걸 때늦은 늑장이 피어올랐다. 과천 바람을 쐰다고 갑갑한 마음이 풀릴 일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시간을 보냈으나 시계바늘은 그 자리였다.

 

 

한 부장과 나는 정부청사 구내식당으로 갔다. 한 부장이 마주앉아 나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 오늘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

, 그런 건 아니고... ”

나는 쓴입맛을 다시며 얼버무렸다.

곧 통합작업한다면서요. 임원들끼리 서로 안맡을라고 CU장한테 로비 한다던데요. ”

로비한다고?”

“...............”

하긴, 내가 하겠소 하고 자진해 누가 나오겠어. ”

이사님이 맡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어찌되어 갑니까? 다들 이사님 밖에 없다고 그러던데요. ”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느 놈이 그래!

나는 역정을 냈다. 가뜩이나 머리가 무거운 판에 한가닥 남은 나의 기대마저 헤집었다.

관리자들도 다 그래요. ”

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부장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따위 소리, 하질 말아. ”

순간적으로 내 목소리가 커졌다.

“ ................... ”

한 부장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미안했다. 한 부장 말대로 사내 움직임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걸 나도 감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너 말이 맞아. 낌새가 이상해. ”

하라카면 하면 되잖아요. 고민할 게 뭐 있어요. ”

할 사람들 나 말고도 많아. 그 양반들이 해야지... ”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는 말을 이었다.

“ ... 회사가 어디 나 혼자뿐이야. 이번 일은 나같이 쫄때기가 할 일이 아니야. ”

하긴 지난번 OVA 때도 고생하셨어요. ”

그것도 엉겁결에 하게된 거지. 이제 정말 그런 일 그만하고 싶어. 내 명대로 못살 것 같애. " 

" 무슨 엄청난 말씀을 하세요. "

" ........  OVA 이야기 나왔으니까 하는 얘긴데 너야말로 OVA 스타 아냐? ”

나는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저야 뭘, OVA 포스타에 얼굴 한번 낸 걸 가지구요. ”

사내서 니 모르면 간첩이잖아. 네 얼굴이 공장,본사 온 사방에 다붙었으니...그게 보통이야? ”

스타긴 스타네요. 스타고 뭐고  별수 있습니꺼, 시키면 해야지요. "

 

 

한부장과 한자락 농담을 주고받으며 머리를 식혔다.

아마 오늘 결정 날거야. 실은 오늘 경영회의가 어찌 됐는지 궁금해. ”

제가 알아볼까요? 전화해서... ”

잠시 후 한 부장이 구내식당 한구석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돌아왔다.

경영회의는 아직 안끝났답니다. 분위기가 별로라는데요. ”

역시... ”

바로 그 안건임에 틀림없었다.

 

과천에서 회사로 돌아오니 오후 2시였다.  오전 아홉시에 시작된 경영회의는 그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희종 CU장은 평소 회의를 길게 끄는 편이 아니었다.

 

나를 보자마자 기다리다 애가 탄듯 비서 김희장이 반겼다.

“ CU장께서 두 번이나 찾으셨어요. 빨리 들어오시래요. ”

 

그 순간. 어떤 예감이 뒤통수를 쳤다

 

' 그런데 그 일이... 그 일이 또 나에게... ‘

아니야. 이번은 아니야. ’

 

상반된 심사가 갑자기 어지럽게 교차했다. 이럴 때 그 예감은 대체로 내 의사와 반대쪽으로 적중했다는 사실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회의실은 내 자리에서 복도를 따라가다 모퉁이를 한번 도는 곳에 있었다. 회의실 문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회의실내 십여 명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종일 고조된 열기와 뿜어낸 담배연기로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 공조시설을 자랑하는 트윈빌딩도 이런 오소리 소굴이 없었다.

상반기 매출,손익 실적 점검 등 오늘의 토의 안건들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점심도 걸러가면서 진행한 장시간의 회의였다.

내가 올 때까지 CU장이 일부러 회의를 끌어온 것 같았다. 내가 나타나자 장시간의 홍역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이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서 감지되었다.

 

(10화끝)

 

 

 

한진형 부장(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