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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김상무 아리랑(9화) " 통합작업 누가 좋을가?추천해봐."

9.

 

 

김 이사, 잠깐 앉아봐. ”

 

93 89. 이희종 CU장에게 결재를 받고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나는 CU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눌러앉았다.

CU장은 무언가 상의를 할 일이 있으면 늘 이런 식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럴 경우 당신으로서는 이미 많은 생각을 한 후라는 사실이었다.

 

년 초부터 나오는 이야기 알지? ”

 

“ ............... ”

 

우리 통합작업 말이야. 이제 곧 시작해야할 것 같애. ”

 

나도 언젠가 해야 할 과제로 여기고 있었다. 워낙 방대하고 한편으론 뜬구름 잡는 일이었다.

 

" ................ "

 

회장실에서 매킨지까지 끼워서 밀어붙이고 있어. 며칠 전 사장단 회의에서 그룹회장이 언제 시작할거냐고 물었어. ”

 

구자경 그룹회장이 채근을 할 정도라면 현실로 다가왔다는 의미다.

 

“ ................ ”

 

이 걸 누가 맡아야하는데... ”

 

CU장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김 이사가 보기에는 누가 좋을 가? ”

 

CU장은 작정을 한듯 나에게 물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간단치 않다는 직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나는 애써 CU장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까지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대상이 될 만한 임원들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

 

나는 엉거주춤 되물었다.

 

내일 오전까지 해줄 수 있을 가. 시간이 없어. 회장실 친구들하고, 매킨지의 아카반지 누군지 하는 친구들이 오겠다는 데 내일 보자고 했어. ”

 

“내일 오전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서정균 상무입니다. ”

 

".............."

 

 

CU장실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의자에 기대어 정신을 추슬렀다. 말씀대로라면 내가 인사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이번 통합작업을 지휘할 적임자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추천해보라는 의미였다. 이희종 CU장의 계산은 그게 아니었다

 

통합작업이라면 당연히 산전CU의 전략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서 상무를 빼고는 말이 안되는 일이다. 결재를 받고 나오려는 나에게 추천 운운하며 느닷없이 한마디 던진 이희종 CU장의 저의가 자못 마음 한구석에 캥겼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가. 2년 전 OVA를 나한테 맡길 때하고... 밟아가는 수순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럴수록 기대가 없진 않았다. 이번만은 비껴갈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상무,전무 고참들도 많은데 설마 쫄대기 이사인 나한테 맡기시려구. 통합작업은 간단치가 않아. 재작년 OVA하곤 다르지. ’

 

아니야, 이희종 CU장은 분명히 나를 찍어놓았어.’

 

나는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접었다 되풀이했다. 생각수록 CU장이 친 그물에 걸린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바로 이틀 뒤인 8월 11일의 경영회의에서 상황은 여실히 드러난다.

 

 

 

 

 다소 장황하지만 지금부터 OVA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902월, 그룹에서는 경영이념을 선포했다顧客을 위한 價値創造 人間尊重經營 이었다. 구자경 그룹 회장이 직접 붓글씨로 쓴 경영이념은 액자에 넣어져 각 회사에 배포되었다. 특히 가치창조라는 표현이 생소했다.

 

매달 동관 대강당에서 회장실이 주관하는 임원 월례모임에 고객의 자리도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단상 오른편에 탁자와 빈의자 하나가 덩그렇게 놓였다. 탁자 위에 '고객의 자리' 팻말이 얹혀졌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치 유령의 자리처럼 보였다.

 

그룹 각사는 이를 본받아 고객의 자리’를 서둘러 만들었다. 고객의 자리는 주요회의나 모임에서 빠뜨리지 않았다.기업으로서  '고객'의 가치를 그렇게 상징화했다.

 

 

OVA 프로젝트 추진의 개념도

 

 

 

경영이념 선포와 동시에 그룹에서는 혁신이 화두로 등장했다. 혁신의 바람은 ‘ OVA( Overhead Value Analysis )'의 추진으로 구체화되었다. 간접부서 업무의 효율화를 위한 프로젝트였으나 깔린 의미는 혁신마인드 조성과 기업 체질의 강화였다. OVA 프로젝트의 추진은 혁신활동의 상징적인 수단이었다.

 

럭키금성 그룹의 90년대 벽두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과제로 열렸다. 특히 구자경 회장이 나서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탑 매니지먼트 스타일이나 사고의 변화가 수반하지 않고는 진정한 혁신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리에 스스로 그룹 회장이 솔선하여 앞장서는 모습이었다.

 

한편 다음 세대 승계를 앞두고 그룹회장으로서 대미를 장식하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경영이념 선포로 시작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은 OVA로 이어져 90, 91년 그룹 전체를 한바탕 거세게 흔들었다.

 

 

OVA 프로젝트는 매킨지가 지원하는 형식을 택했다. 외부 컨설턴트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에 그룹 각사가 동시다발로 추진할 수가 없어 나름대로 순서가 있었다.

 

매킨지에게 아예 동관 회장 비서실 한쪽에 방을 차려주었다. 매킨지가 구사하는 마케팅 전략은 구자경 회장을 비롯한 회장단에 대한 탑 세일이었다. 매킨지 비즈니스의 특징이었다.

찰거머리의 상업성은 우리 그룹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심지어 ‘구자경 회장이 매킨지의 오마에 겐니치에 불알을 잡혔다 는 우스개소리까지 나돌았다.

 

 

 

 

 

 

그룹의 주력회사인 금성사와 럭키가 먼저 테이프를 끊었다. 그룹의 정책위원회나 사장단 회의 안건에 정기적으로 프로젝트 추진과정과 효과가 보고되었다.

 

금성사나 럭키는 이미 큰 성과를 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럭키 최근선 CU장이 직접 나가서 성공사례를 발표를 하는 등 그룹차원의 사외 홍보에도 열중했다

 

금성사와 럭키에서 OVA 성과가 좋다는 첫 반응이 나오자 정책위원회와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이 연거푸 관심을 표명했다. 회장이 한두 번 칭찬하면 효과는 다방면으로 즉각 나타났다.

 

회사들 간에 너도나도 해보자는 경쟁심을 자극했다. 눈치 빠른 일부 사장은 앞질러 추진의사를 밝혔다. 알아서 긴다는 눈총과 수군거림이 그룹 각사를 넘나들며 퍼졌다. 이럴 때 사장들이란 전혀 딴나라 별나라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이희종 CU장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몇번 퇴짜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뜬금없이 들려왔다.

 

 

90년이 저무는 10월, 찬바람이 불자 아니나 다를 가 ‘OVA는 이젠 산전 차례다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금성사와 럭키는 OVA프로젝트를 마쳤거나 마무리 중이었다. 인원 규모로 보나 매출액으로 보나 다음 차례는 호남정유가 아니면 산전 차례가 분명했다. 원하든 원치않던 그룹 내 순서가 대충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실 참모들의 반응도 두 갈래였다

  

쥐뿔도 없이 산전이 해야지, 왜 안 나서는가. ’

산전이 하면 효과가 제일 클 것이다. ’

 

 

나는 이희종 CU장의 성향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CU장은 반골기질이 있었다. 줏대없이 뛰는 일부 사장들의 평소 일거수일투과 달랐다. 회장실과 매킨지의 장삿속에 떠밀리는 모양새가 CU장은 체질적으로 탐탁치않았다.

그래서 회장한테 찍혔다느니 이희종 CU장이 년말 사장단 인사에서 바뀔 거라는 소문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산전이 다음 차례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은 여러 정황이 말해 주었다. 90년 벽두부터 불기 시작한 그룹발 변화와 혁신의 회오리는 산전 쪽으로 닥아오고 있었다. 

 

91산전CUOVA 프로젝트 추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사장단 회의에서 구자경 회장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다는 말이 들렸다. 급기야 며칠 전에 동관 회장실 임원이 이희종 CU장을 만나고 갔다는 말이 회사에 퍼졌다. 회장실 임원이 나타나면 주요 의사결정 사항이 있다는 뜻이었다.

 

 

 < 산전 CU OVA 프로젝트 >. 매킨지의 컨설팅으로 일년 간 일정이었다. 먼저 결정해야 할 사안은 어느 임원이 이 프로젝트를 맡을 것인 가였다.

 

외국 컨설턴트인 매킨지와 협업은 생소한 일이었다. 게다가 OVA는 이미 그룹 구자경회장이 선도하는 혁신 활동의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다음 타자는 그에 능가하는 성과를 내야하는 이중의 부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대충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과연 누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것인가. OVA를 맡을 가능성이 있는 임원들은 내심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회사에서는 다들 전략기획 본부장인 이창재 상무를 적임자로 여겨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어느날 이창재 상무가 나를 불렀다.

 

“ OVA 어떻게 생각해요?"

 

".............."

 

"김 이사. 김 이사가 담당하는 게 맞잖아. ”

 

이 상무가 은근히 선수를 쳤다.

 

“ CU의 전략을 맡으신 분이 하셔야지요. ”

 

나는 정색을 했다.

 

아니야. 총무 인사 쪽에서 제일 할 일이 많찮아. 그러니까 김 이사가 차라리 맡아서.... ”

 

“ 중이 제머리 못깎지않습니까. 그리고 CU 전체로 봐야지요. 회사가 네갠데... 거기다가 공장까지...  제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쫄대기가 지금 하고있는 것만 해도...”

 

그리고 말이여. 김 이사는 일본 능률협회와 NBP도 하고, 경험도 있쟎아. 안그래. 사원들도 김 이사가 적격자라더구먼. ”

 

이창재 상무는 내가 총무과장일 때 직속상사인 총무부장이었다. 대화를 나누기 편한 상대만은 아니었다.

 

회장님이 직접 챙기는 관심사항 아니십니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

 

허허, 고집 세네!

 

 

이 상무는 나를 볼 때마다 되풀이했다. 이 상무가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CU장이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CU장의 전략 참모로서 사전에 합의를 해두려는 준비성과 혹시 어느날 갑자기 자신에게 떨어질지 모르는 염려 때문이었다.

 

 

상무님이 정 그러시다면 다른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 CU장께 건의하십시오.”

 

그 사람들인들 내가 뭐랄 수 있나.김 이사니까 내가 이러는거지..."

 

 

이 상무와 심리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상무가 말하는 경험이란 내가 금성계전의 심사부장 시절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의 수립과 < NBP(New Business Plan: 신사업개발) 프로젝트 >의 추진을 맡았던 사실을 말했다.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을 이태에 걸쳐 수립하고 보완해 갔다. 82, 83년도는 석유파동과 이미 투자한 중전기 사업의 구조조정 등의 여파로 회장실이 파견한 감사팀이 들이닥칠 정도로 금성계전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회사 안에서는 도저히 진척이 되지않아 각 사업부와 제품 개발실 등 실무팀을 이끌고 산정호수에 가서 일주일 동안을 합숙을 하면서 완성을 했다. 아카데미 하우스,안양 관광호텔에서 전사 관리자 이상이 모여 워크샾 겸 토론회를 가지므로서 조직을 총 동원하고 전사적인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거쳤다.

 

당시 정부도 아닌 민간기업이 장기전략을 구상하고 수립한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이후 장기 경영계획 수립이 회사 경영의 패턴이 되고 워크샵이 보편화되었다.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은 그룹의 기획조정실 이헌조 사장한테 내용을 직접 보고했다.

일본능률협회(JMAC) 도움으로 추진한 < NBP >는 미래의 성장동력을 감안한 신사업 발굴 프로젝트였다. 일 년 걸렸다

 

 

이런 이력으로 특별 태스크 팀 하면 모두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같이 일을 해본 부과장들은 나더러 일 욕심 이 많다고 불평 아닌 불평하는 소리를 냈다. 시한을 정해놓고 하는 프로젝트란 달군 쇠를 식기 전에 두드리는 거와 다름이 없다.  

 

 

 

 

인사업무담당의 조직도

최상훈,강명철,양관모,이한우,송병남,한진형,성효경,김주현 부장들의 이름이 보인다. 

 

 

 

 

내가 담당 업무는 인사, 연수, 업무, 홍보, 총무, 비상기획이다. 부장 9, 과장 18명에 사원이 98명이었다. 계전, 기전의 관리부문과는 일의 내용이 달랐다. CU장의 스탭이자 중핵회사로서 CU 4개사의 공통 업무를 지원했다. 조직 스팬으로 보면 임원 네 명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임원 2년차 이사인 나에게 설마 OVA 까지 하라고 하진 않겠지 하고 자신했다.    

 

 

 

 

 

 

 

 어느날 오후.

사장의 비서인 미스 최가 분홍색 보자기 하나를 무겁게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 CU장께서 이사님께 직접 갖다드리래요

 

직접 갖다드리라 는 말에 힘을 주었다.

 

한자 높이의 분홍색 보자기는 우선 보기에도 묵직했다. 풀어보니 맨 위에 명함 몇 개가 붙어있었다. 층층이 OVA에 관한 자료가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몇 달 동안 사장단 회의에서 논의되었던 OVA 관련 자료와 최근 매킨지와 몇차례 면담하면서 받은 제안서였다. 맨 위 명함들은 며칠 전에 CU장을 찾아온 듯 회장실 실무자와 함께 온 매킨지 컨설턴트의 명함이었다.

 

 

서류 앞장 위에 사장 특유의 친필이 유난히 크게 내눈에 들어왔다.

 

‘ OVA ’, ‘ 형철 理事

 

드디어 올게 왔구나. ’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OVA를 맡으라는 사령이었다. 임원이 사장의 여비서로부터 전달받은 < 산전CU OVA 사무국장 >사령장이었다.

 

임원이 여비서한테서 사령장을 받은 사례가 있나? 이건 기네스북 감이야. ”

 

CU장으로 선 코믹했으나 나로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희종 CU장은 임원들의 숨바꼭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내 여론도 여러 갈래로 들었을 터였다.

 

이런 소포를 여비서 손에 들려 보낼 때까지 CU장은 왜 일언반구도 없었을 가. ’

 

(9화끝)

 

 

 

 

OVA 사례를 길게 기술하는 이유는

앞으로 전개되는 통합작업의 초기 맥락과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

 

 

 

"임원이 여비서한테서 사령장을 받은 사례가 있나? 이건 기네스북 감이야."

 

 

지금까지도 이 말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