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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김상현 교수를 애도함,45년 전 다솔사 시절을 회상하다

 

 

 

 

오늘 아침에 텔리비전 화면 밑으로 지나가는 자막을 보고 놀랐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별세'

 

2011년 8월12일 이 블로그에 올렸던 내 글이 생각났다.

 

'다솔사일기'라는 소제목으로 7회에 걸쳐 다솔사 이야기를 썼는데 마지막 분을

다시 전재하면서 김상현교수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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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삼 꺼내본다.

 

 효당 최범술께서 그 때 주신 글을 007가방에 접어둔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 송구스럽다.

 '茶道無門'은 그렇다치고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 중의 글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의미를 아직 나는 모른다.

 

당시 효당의 말씀을 듣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로부터 2년 뒤 1979년 효당은 76세로 입적했다.

법랍 63년.

 

서포 바닷가 밤섬에서 4남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범술은

13세에 다솔사에 출가한 다음  해인사에서 임환경 스님으로부터 수계했고

원효불교 복원에 서원을 해 스스로 효당이라 법호를 지었다.

 

47년 해인사 주지가 된 효당은 6.25의 와중에 자칫 폭격과 소실 위기에서

팔만대장경을 끝내 지켰다.

일찌기 박열 의사의 일본천황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만해 한용운과 만당을 결성하고 이후

다솔사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효당이 만해의 회갑을 다솔사에서 베푼 사실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효당은 그토록 왜 원효인가.

원효대사는 역사상 불교를 대중화한 민중불교의 시조다.

다수의 민중으로 사회적인 통합을 이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건 당연한 귀결이다.

속성이 설(薛)인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효당이 원효불교라는 종단을 만들고 다솔사를 그 도량으로 생각하며 아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사후 뒤늦게 효당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나 그 과정도 순탄치않았다.

효당의 말년도 말년이려니와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안타깝다.

- 죽은 사람이 사람이 산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가 없을 가.

다솔사에 만해가 심은 향나무와 안심료 앞 금잔디 밭이

오로지 진실을 말해줄 뿐이다.

 

 

 

평창동에서 북한산을 오르면 대성문으로 넘어가는 능선 초입에 일선사 절이 있다.

어느날 등산 길에 절 아래 샘터에 물먹으러 갔다가 절 입구 게시판에 붙은 법회 공지문이 눈에 띄었다.

 

'원효사상과 한국불교.

초청 강사-김상현(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 다음날 물어물어 휴대전화에서 들려오는 김상현 교수의 목소리를 엊그제같이 사십년 만에 들었다.

3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날카롭게 숙제 하나가 남았다.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상현 수좌에게 물어봐야겠다. 

다솔사를 떠난 효당이 이 글을 나에게 주신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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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끝내 김상현교수에게 물어볼 수 없게되었다.

 

1968년 69년 이즈음 두어달 나는 다솔사 봉일암에 머물렀다.

 

당시 효당 최범술 조실의 수좌였던 김상현은 왜소했던 체격과 달리

그후 우리나라 불교사학계에 우뚝 선 거목이 되었다.

 

한번 만나자는 5년 전 전화기 목소리가 다솔사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동갑내기 김상현.

 

죽로지실 반야차 다도에 몰입했던 봉명산 다솔사 시절을 회상하며

다시한번 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