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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개골, 굴포운하는 말한다

 

6년 전 쯤 내가 태안에 온 다음 해, 가을 어느날이다. 이웃 집  배 선생과 바다 낚시를 하고 있었다. 배 선생이 조그만 동력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 때를 봐서 같이 자주 바다에 나갔다. 바다라야 집 뒤로 보이는 가로림만으로 도내나루에서 구도항을 끼고 2,3십분 나가는 거리다. 가을 찬바람이 일 쯤에는 햇살 아래서는 우럭을 잡고 날이 이슥해지면 그 때부터 바다장어가 올라온다.

"저 위로 더 올라가면 어디가 나와요?"

나는 낚시를 하다말고 당섬을 지나 동쪽 팔봉산을 보며 배 선생에게 물었다.

"둑 너머는 창갯골이유."

제방이 만들어 지는 바람에 제방 위로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갯벌은 수로가 생기고 간사지가 만들어졌다.  

"창개골요. 창개골이 무슨  말입니꺼?"

"모르겄슈. 창개골, 창개골 해서 창개골인 줄 알고만 있슈."

배 선생은 선조대대로 살아온 태안 터줏대감인데 대답이 의외였다. 궁금했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배 선생은 3년 전 일흔에 세상을 떠났다.

 

         가로림만의 남쪽 끝자락 갯벌에서 바라본 팔봉산과 구도항.  굴포운하 북쪽 출구다.

 

                                                                         태안과 서산을 잇는 가로림만 제방.

 

 

 

 

 

굴포운하(掘浦運河)는 천수만(淺水灣)과 가로림만(加露林灣)을 연결하는 운하를 말한다. 선조들은 일찌기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도내리(가로림만 쪽)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진장리(천수만 쪽)를 잇는 총연장 6.8㎞(폭14m)의 내륙 뱃길을 만들려고 했다.
고려(高麗)의 인종(仁宗) 12년 (1134)에 처음으로 착공하였다는 기록과 공양왕 3년(1391)에 다시 공사를 재개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태종 12년(1412), 세조 7년(1461)에 이어 현종(顯宗) 10년(1669)까지 고려와 조선조를 통틀어 무려 530여년간 끈질기게 굴착을 시도를 했다. 

 

삼남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조운하는데 선단은 태안반도의 서쪽 안흥량(安輿梁)을 통과해야만 했다. 안흥량은 물살이 거세기도 하거니와 암초가 많아서 선박이 파선되어 침몰하는 사고가 빈발했다. 예로부터 바닷길이 험난한 곳을 세 군데를 꼽으면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목, 그리고 심청의 효심으로 알려진 황해도 장산곶이다. 이 중에서도 안흥량이 가장 험악해서 선원들이 승선을 꺼려했다. 순조로운 항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본래의 지명인 난행량(難行梁)에서 안흥량으로 고쳤는가 하면 지령산자락에 안파사라는 절을 짓기도 했다. 조선조의 태조(太祖)에서 세조(世祖)까지 60년의 기록 만 살펴보더라도 안흥량에서 선박 200여 척 침몰, 1,200여명 사망, 미곡 손실 15,800석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조에서 굴포운하를 시도한데는 당시 인근 해역에 왜구들이 창궐하여 나라 살림의 큰 몫인 세곡을 분탕질 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한 의도도 있었다. 왜구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으면 내포의 중심 해미에 한때 이순신 장군이 근무했을 정도였을가.

운하가 건설되면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으로 들어가 가로림만을 통과하면 서울에 곧장 이르게 되므로 안전한 항해에 시간도 단축되었다.

 

 

  

 

                                        굴포운하 유적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만든 조망대와 다리.

 

 

 

인평리의 굴포운하 바로 옆에서 과수원과 농사를 지으며 4대째 살고있다는 가(賈)씨 영감을

우연히 만났다. 소주 가씨는 임짐왜란 이후 태안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세조 때 신숙주가

와서 굴포운하 공사를 지휘하기도 했다면서 웅덩이 아래 암반 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당시의 기술로 암반은 속수무책이었 것이라고 말했다.

방학 때가 되면 단체로 학생들이 역사탐방이나 현장 학습을 위해 더러 찾아온다고 했다.

주위는 흙이 무너지고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하다.

 

 

 

굴포운하는 온길이(全長) 7㎞중 4㎞만 개착되고 나머지 태안읍의 인평리와 도내리에서 서산시의 팔봉면 어송리, 진장리에 이르는 3㎞는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다. 단속적(斷續的)으로 공사를 하는 동안 연인원 수만 명의 군정(軍丁)을 동원하였으나 암반이 있고 조수(潮水)가 밀려오면 허물어지기 일쑤여서 공사를 중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굴포운하의 흔적을 실측한 결과 밑바닥이 제일 좁은 곳은 14m이고 제일 넓은 곳은 63m로 나타났다. 

굴포운하의 공사가 어려움에 부딪치자 궁여지책으로 제2의 운하 굴착지를 물색하기도 했다.

태안에서 만리포를 가다 소원면 송현리에 무네미재를 지나 송현저수지에 이르는 구간에 의항 운하유적지가 있다. 무네미재란 지명도 이곳에 운하가 개통되면 고개로 물이 넘어온다 해서 붙여졌다. 조선조(朝鮮朝)의 중종(中宗) 16년(1521)에 3천여 명의 군정을 동원하여 공사를 착수하여 1537년(중종 32)에 일단 완성을 보았으나 얼마 후 무너져내려 의항운하도 실패로 끝났다.  

지금의 안면도는 본래 섬이 아닌 안면곶(安眠串)이다. 해난 사고를 줄여보자는 발상에서 1646년 경 조선의 인조(仁祖) 23년  영의정 김유(金流)가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를 사이를 절단해 안면도 판목이라 불리는 작은 운하를 굴착하므로서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운하 대신 천수만 쪽의 태안읍 평천리에 창고(南倉)를 짓고, 가로림만 쪽 도내리에 창고(北倉)를 지어 세곡선이 안흥량(安輿梁)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으로 들어와 세곡을 남창에 입고시켜 육로로 북창으로 운반해 가로림만을 통해 다시 배로 서울로 운송하기도 했으나 이 방법도 오래가지 못했다. 태안에는 이처럼 끈질기게 운하를 발상하고 대안을 개발하여 실행에 옮긴 흔적이 많다.

 

고려사에 공양왕 3년(1391)의 굴포운하 굴착공사지가 탄포(炭浦)라는 기록이 보인다. 태안군 태안읍과 서산시 팔봉면 일원에 탄포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으나 도내리와 이웃한 어은리에 탄동(炭洞)이라는 마을이 있고 해안가를 탄동개라 부르는 걸로 보아 탄포와 무관치 않다. 현재 여러 군데 발견되는 축대가 굴포운하의 굴착지임을 뒷받침 해 준다.  

공사를 했을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케하는 전설이나 지명이 내려온다.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 있는 신털이봉은 공사를 마친 군정들이 쉬거나 집으로 돌아갈 때 짚신에 묻은 진흙을 한 곳에 털었다. 이 때 턴 흙으로 저절로 만들어진 야트막한 야산을 신털이봉이라 해서 한 줌도 안되는 흙에 서린 애환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시리게 한다. 우리집에서 5분거리에 있는 북창정미소 일대가 북창이 있던 자리이다. 

태종 12년(1412)에는 하륜이 오늘날 갑문식 운하를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울 용산에서 숭례문까지 운하 건설을 주장한 하륜은 물에 관한 선각자로 보인다.

 

                                                                                             남쪽에서 본 구도항. 

 

우리 집 뒤로 보이는 구도항에서 동쪽으로 팔봉산을 바라보며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방이 있고 그 너머로 간사지 일대를 이곳 사람들은 창개골이라 부른다. 이곳이 바로 340여년 전까지 5백 여년동안 굴포운하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창개골을 지나면 야산을 가운데로 가라지는데 동쪽으로는 어송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인평리와 진장리를 지나 천수만에 다다른다. 천수만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굴포운하 현장으로 그 중 가장 높은 태안읍 인평리 일대를 판개골이라 부른다. 운하공사로 인해 논을 가로 질러 물길이 생겼기에 양쪽으로 나눠진 논을 판개논이라 했다.

여기서 나는 비로소 창개골의 비밀을 풀었다. 판개골을 창개골로 발음하기 쉽게 판개골이 창개골이 된 것으로 본다. 5년 전 이웃 배 선생과 바다 낚시를 하며 내가 창갯골의 어원을 물었던 그 창개골이다. 3년 전에 유명을 달리한 배 선생은 창개골의 의미를 모른 채 가셨다는 말인가.

 

                                                                                                              창개골 

   

굴포는 우리나라 지명에 더러 나타난다. 글자 그대로 인위적으로 개착한 하천을 말한다. 경기도 부천과 김포의 고촌을 잇는 굴포천도 고려 고종 때 처음 시공한 이래 조선조 중종 때 다시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삼남지방의 미곡을 강화 손돌목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의 경창까지 수송해야 했다. 손돌목 또한 험난하여 인천 앞바다에서 바로 한양으로 연결하는 지금의 경인운하 즉,굴포 운하를 생각했던 것이다. 부평에서 백운으로 넘어가는 원통이고개를 뚫지 못했다. 오늘날 보면 하루 아침 일거리도 되지않는 토목공사가 당시로서 첨단 기술과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굴포운하의 남쪽 천수만

 

 

강화 손돌목 뱃길에서 비롯된 김포의 굴포운하가 1230년대 고려 고종 때이므로 태안의 굴포운하가 백여 년 앞선다. 스에즈운하는 1869년에, 파나마운하는1914년에 건설되었다. 태안의 굴포운하는 조거(漕渠) 즉, 배가 다니는 도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초이다. 굴포운하는 더이상 일반명사가 아니다.  굴포운하는 오로지 태안에 있다.

 

태안과 서산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자원으로 굴포운하의 개발 이야기가 들린다. 결론적으로 예산 타령에 정치까지 개입된 단순 개발로 문화유산의 원형질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한다.  해외 문물의 소통 기지이자 해양교통로서 태안, 조운과 해양 방어의 거점으로 태안은 역사에 무궁무진 다양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굴포운하가 비록 현실로 만들어지진 못했으나 신털이봉의 전설에는 민초들의 숨결이 어우러져 애잔하다.

무엇보다 굴포운하는 불굴의 도전정신이 살아있는 현장이다. 한 발 앞서 나간 조상들의 예지를 기리는 문화유적으로 엄숙히 간직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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