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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귀촌 그리고 태안 마애삼존불

 

집에서 태안읍내를 오가는 길도에 백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고 한참 올라가다보면 태을암이 나타난다. 태을암을 비껴 돌계단을 3십여미터 오르면 태을동천 글씨가 나타나고 일소계를 왼쪽으로 돌아들면 태안 마애불상 전각이 서있다. 마애삼존불상은 그 전각 안에 있다.

 

 

 

내가 태안 마애삼존불상을 처음 만난 건 2004년 초가을 무렵이다. 이곳 도내리에 집을 짓고있을 때였다. (이 때의 상황은 내가 쓴 <버갯속 영감>에 나타나 있고, 블로그 <도내리 오솔길>의 '버갯속영감 교유기' 7회분인 '인연'에 전재되어 있다.) 바로 직전인 8월31일자로 마애불상이 국보로 지정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라는 책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어 한 권을 받아왔는데 그 때 한번 슬쩍 보고는 책장에 꽂아두기 만 했다. 그러나 최근 나는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를 여러번 읽었다.  

<태안 마애삼존불연구>의 저자인 林成萬님은 태안 출신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향토사학자이자 문필가이며 서예가다. 향토를 사랑하는 열정이 <태안 마애삼존불연구> 서문에 그대로 살아 숨쉰다.

-태안 마애삼존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가슴 언저리가 파르르 떨려오고 설레임과 공 그 자체가 상존하는 곳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태안마애불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삼존불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너무 많은 사실들이 아직도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백제사람들은 6세기에 어떤 사상으로 이 불상들을 조형하였을까?하는 화두로 태안 마애삼존불을 연구한 결과 10여년 만에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를 마무리했다. 어느나라 어느 시대에도 없는 파격적인 도상이 창안된 것은 백제가 이미 6세기에 독자적인 교리해석을 조형화할 만큼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해이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백화산을 올랐고 그 때마다  <태안 마애삼존불상> 앞을 지나갔다. 서울에서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여러번 안내를 하기도 했다.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는 나에게 귀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내포의 향토문화도 문화려니와 무한한 긍지를 갖고있는 <태안 마애삼존불연구>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 있는 한 태안의 얼은 살아있다. 나도 덩달아 귀촌 태안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래서 오늘도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를 다시 읽는다.  

 

1994년 하부발굴 후 모습으로 하부 연화문 대좌가 뚜렷이 보인다. 바위 전체가 두꺼비 형상이라는데 지금은 전각으로 인해 마애불상 주위의 윤곽을 가늠할 수 없어 아쉽다. 바위 뒷면에 좌불상이 조형되어있는데 볼 수가 없다.

 

삼존불의 중앙에는 연화대좌를 포함하여 총고 2.23m,상고 1.8m인 관음보살입상이 있고, 왼쪽에 총고 3.06m, 상고 2.55m의 아미타여래입상이, 오른쪽에는 총고 2.96m, 상고 2.40m의 약사여래입상이 있어 도상의 결합이 특이하다. 삼존불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여래를 두고 양쪽에 보살을 작게 만들어 삼존을 이룬다. 태안마애삼존불은 비록 가운데 보살을 두었으나 양 옆의 여래는 더 크고 우람하게 조각하였으며 여래와 봘의 비례를 깨뜨려가며 구태여 작은 관음보살을 두어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의 크기가 비슷하고 표현방법도 같다. 얼굴은 圓刻에 강하게 돌출되어있고 하체로 내려올수록 낮게 표현되어 연화대좌는 線刻에 가까워 앞으로 기울어진 느낌을 준다.  이런 표현 방법은 삼국시대 마애불의 특징으로 앞으로 예배자들과 눈길을 마주치도록 위함일 것이다. 양쪽 협시 여래의 얼굴은 풍만하다. 가는 눈,큼직한 코, 팽창된 뺨과 양 옆의 입가엔 보조개가 패여서 古拙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처럼 태안마애삼존불에는 순수의 미소가 있다. 좌우불상의 미소는 친근하고 편안하다. 네모진 얼굴에 큰 눈,살짝 벌린 입에는 해맑고 복스러운 미소가 가득하다. 수더분하고 털털하지만 순수와 고풍이 살아 숨쉬는 미소로 백제인은 그렇게 웃었다.

목은 三道가 없이 굵고 어깨는 벌어져 당당하다. 층단식 옷주름은 탈락이 심하다. 왼쪽 여래의 두 손은 通印 즉, 모든 여래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手印인 施無畏印(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손짓)과 與願印(모든 소망을 들어주겠노라는 손짓)을 맺고 있는데 모두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왼쪽 불상의 머리 정상에는 작은 팽이 모양 肉계가 얹혀져있는 모습은 불상 얼굴의 기본 골격과 함께 같은 전통에서 유래한다.

 

본존이 석가여래의 대자대비한 마음의 형상화한 관음보살이므로 왼쪽 여래는 석가여래라 볼 수 없고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 본존의 오른쪽 여래는 왼손에 약곤(藥壺)을 받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는 일반적으로 둥근 보주가 아닌 납작한 약합을 들고 있는데 약합을 들고있는 여래상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약사여래의 신앙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백제인들은 중국의 양식을 받아들였으나 관음보살을 가운데 두고 두 여래를 과감히 양 옆에 둔 특이한 圖像을 창안했다. 백제 나름대로 신앙형태가 확립되어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과감히 표현하려 한 것은 그만큼 백제인들의 문화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태안마애불이 조각된 바위 뒤편에 총고 92cm, 두고 30cm, 견폭 40cm, 신고 62cm 좌불상이 돋을 새김되어 있으나 눈여겨 보지않는다.

 

                                     갈라진 틈을 드잡이 공법으로 경화처리하기 전, 마애불 측면. 심하게 갈라져 붕괴직전의 모습 (1994년)

 

                                                                            경화 처리된 마애불 측면(현재)

 

태안마애삼존불은 태안의 주산인 白華山(284m) 서쪽의 태을암에서 동편으로 30m 떨어진 자연바위 벼랑에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다. 마애불 근처에서 보면 서해의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이 펼쳐진다. 아침해가 떠올라 마애불을 비추면 살짝 감은 눈에 온화한 미소에 감탄한다. 이런 경승지에 백제시대의 관음도장이 조성된 것은 이런 연유도 무관치 않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관음보살이 머물고있는 산이 백화산이다. 인도의 남쪽 해변가 폴탈라카(Potalaka) 산은 백화산을 의미하며 작고 흰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산에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하려는 관음보살이 살고있었다. 백제와 밀접한 관계인 중국 동진의 화엄경이 백제에 널리 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백화산이 광명산으로, 당에서는 補달洛迦로 번역되어 있다. 중국에 유학하여 670년에 귀국한 신라의 의상은 동쪽 해변에 洛山寺(補陀洛迦의 洛자만을 따서 붙인 이름)를 짓고 관음도량을 세우고 白華道場發願文을 짓는다. 태안마애불에서 중앙에 석가여래의 자비심을 형상화한 관음보살을 둔 특이한 삼존형식이나 산 이름이 백화산임을 보면 백제는 신라보다 이른 시기에 법화경에 입각한 관음도량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남인도의 포탈라카를 출발하여 세일론의 포탈라,중국 절강성의 보타산,만주의 보타락사, 백제의 백화산,신라의 낙산사, 일본 방지산의 보타락가사 등, 보타락가산=백화산은 관음도량으로 동아시아에 퍼져나갔다. 교학아닌 신앙으로서 관음신앙은 현세적인 의미가 강하다. 서해에서 백화산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안흥항으로 뱃사공들의 무사안녕을 기웡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태안읍에 있는 憬夷亭도 같은 맥락으로 중앙 아시아실크로드를 따라 무수한 사원이 있는 것도 무역상들의 안녕을 빌기 위함이었다.

 

 

 

 

 

 

 

                                                                 밑에서 올려다 본 불상의 바위 뒤와 전각

 

 

                                                                                         전각의 뒤에서 본 바위

 

                   마애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동남 쪽 방향. 태을동천이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태안마애삼존불이 조성된 백화산은 정남향이다. 그러나 마애불이 향하고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다.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동지는 1년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다. 마애삼존불 뒤로 자연석의 면석이 아래쪽으로 10도쯤 숙여져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어 한마디로 햇살은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비바람은 직방으로 맞는 일이 없는 위치에 불상을 새겼다. 백화산에 마애불을 새길만 한 바위가 여기 말고도 많은 데 방향이 왜 동동남이냐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당나라의 석굴사원의 영향으로 조성된 까닭에 내륙 즉, 백제의 수도를 향한 걸로 추측된다. 

 

                                                   마애불상의 전각 위로 태안반도와 서해가 펼쳐진다.

 

 

 

 

삼존불 형식은 본래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6~7세기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유행 형식이다.  삼국시대에 예배대사으로 만들어진 여래상은 주로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여래,서방정토세계의 굦인 아미타여래,용화세계의 교주인 미륵여래였다. 삼존불은 여래상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보살상이 배치되는 것으로 엄격한 도상체계에 따르면 석가여래에는 문수와 보현보살, 아미타여래에는 관음과 세지보살, 약사여래에는 일광과 월광보살 등이 배치되게끔 되었다.

 

태안반도는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지리산으로 가는 한남정맥의 한줄기가 남진하여 성주산, 오서산으로 이어져 서해로 뿜어내어 만들었다. 지형이 완만하여 바다의 조석간만의 차가 8,9미터에 이르러 안개(內浦)가 형성되었는데 삽교천의 평야지대를 포함하여 태안반도 전체를 내포지방이라 부른다. 물산이 풍부한데다  서쪽으로 해로가 열려 외래 문화가 유입되니 한반도에서 문화의  선진지역이 되기에 충분했다.

삼한(三韓)시대는 馬韓의 중심으로  서울 하남 위례성에서 건국한 백제는 영토면에서 최전성기였던 近肖古王을 지나 개로왕 21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남침에 패해 죽고 문주왕 때 공주(熊川)로 남천하였으며 무령왕에 이르러 고구려를 다시 제압하고 서해의 제해권을 가진 해양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백제가 정복국가를 완성한 때가 근초고왕(346~375년)이며 근구수왕(375~384년)을 지나면서 국가 운영의 원리나 문화가 필요했기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6세기에 태안마애삼존불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신라와 사이에서 도읍을 세번을 달리할 정도로 나라는 평온하지않았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으나 1세기 후반 중국을 거쳐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前秦에서 順道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래되었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년) 東秦의 胡僧 摩羅難陀가 전해주었다. 인도로부터 해로로 남중국 동진까지 왔던 마라난타가 백제로 왔다면 고구려를 통과하는 육로가 아니라 배를 타고 상해나 영파 등지를 출발하여 흑산도, 목포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올라와 강화만에서 한강을 거슬러 위례성에 도착하는 해로가 또한 분명하다. 불교는 당시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이념이자 사회현상으로 北魏 문성제는 황제를 현세에 출현한 부처님으로 생각하여 황제를 불상으로 조성하였으며 남조 梁나라 무제는 스스로 보살(菩薩)이라 하여 신정을 베풀기도 하여,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선진문회의 수용에 앞장서온 백제의 지배층들이 이를 모방했다. 당시 북중국을 중심으로 운강석굴,용문석굴,향단산석굴,천불산석굴 등 석굴 조각이 유행하던 시류를 따라 태안반도에 위치한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284m) 서쪽 자락의 절벽에 태안마애삼존불을 조각해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가 아니고 해양세력의 근거지인 내포지방인 태안반도이다. 태안반도가 이 시기에 태안마애불 만한 규모의 불상을 남길 정도로 문화특구이자 문화선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안은 처음으로 마애불이 조성된 곳, 여래입상이 처음 만들어진 곳, 한국 불교사에서 석굴사원의 흔적이 처음 보여지는 곳이다. 백제의 왕도가 아닌 내포의 서북부 해안가인 태안에 마애불이 조성된 연유가 궁금하지않을 수 없다.

태안 서산지역은 선사시대 유물이 다양하고 해미지역에는 청동기 집 자리나 유적들이 분포되어있는 등 높은 수준의 토착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는 臣蘇塗國, 삼국시대는 3세기 후반 고이왕 때 마한 정복과 함께 백제의 省大兮縣이었다. 서해로 부터 남양만,아산만,가로림만,천수만 등이 분포해 고대 해로상의 요충지인데다 태안반도로 유입된 중국의 문화가 백화산을 지나 가야산 줄기를 경유하여 예산,공주, 부여로 이어지는 문화통로를 열었다. 태안마애불은 그런 문화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은 중국의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인의 구김살 없는 소박한 얼굴이며 한국적인 친근마저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한국미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 사상과 소박미, 해학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백제의 미소는 불교 전래의 경로인 태안마애불을 지나 서산마애불의 중앙여래상에 다시 나타난다. 태안마애삼존불상(국보 제 307호)은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에 앞선 백제 최고의 불상이다.

천의의 후면을 U자형으로 처리하는 백제 특유의 조형감각으로 새로운 변화를 주고있는데 중국의 북제. 수대의 조각 영향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특징은 일본에서도 보여져 일본으로 문화가 전파된 자료가 되고있어 바다와 강을 이용할 줄 안 백제인의 문화로 손색이 없다.

반쯤 뜬 눈, 온화한 눈썹,금방이라도 말을 할 것 같은 입...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갖고있다. 천년의 세월을 넘은 태안마애불은 백제가 낳은 탁월한 작품으로 세계의 종교예술사에서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며 불교예술의 진수다.

불교미술의 특징은  장엄미와 신앙심의 구체적인 표현이자 그 때 그 시기의 최고 수준의 조형미술을 대변했다. 백제인은 외래의 불상을 받아들여 단순한 모방 만이 아닌 백제화를 이루어 한국 예술의 특징인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이름다운 불상 조각을 표현하였으므로 백제 장인의 조형성과 예술적 미의식은 현대에 계승되고 있다. 신라는 토착문화가 우세했던 반면 백제는 대외적인 개방성으로 다양하게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했다. 외래문화를 흉내내는 걸로 끝나지않고 온유하고 너그러우면서도 긴장감을 잃지않고 더 세련되게 변모시켰다. 온화하고 섬세함은 고대 농경사회의 풍요로움이 밑바탕이 되었다. 스스로 발전시킨 문화를 일본이나 신라에 전파하는 교량역할에 충실했던 것은 문화적인 선진국으로 백제문화의 활동성과 자부심의 소산으로 보인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고구려의 서북문화와 신라와 일본의 남동문화와 연걸되는 이른바 동아시아 문화의 거점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직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부터 불상을 보호해주는 전실이 있었는지,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고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않고있다. 1400여년의 풍상에 태안마애삼존불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불상의 누과 귀, 코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낫게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설로 불상 일부를 갈아가 얼굴의 자세한 모습은 사라져 아쉽다. 오른 쪽 불상 상부에 직사각형의 홈이 남아있는데 불교적 신앙인 공혈로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불상 앞에 주춧돌이 발견됨으로서 전실기둥을 세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함석지붕으로 보호각을 세울  때 그곳에 세멘트로 메꾸었던 흔적이 있다. 현재의 태안마애삼존불은 1995년 전체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1997년까지 3년에 걸쳐 정비공사를 했다. 그동안 묻혀있던 석불 아래부분을 발굴해 앞쪽으로 기울어 있던 석불을 드잡이 공법으로 바로 세워 경화처리를 했다. 불상이 조형된 돌을 바로 세울때 돌이 갈라질가 노심초사했던 난공사였다. 전실은 맛배 기와집으로 전실 14.9평을 새로 지었으며 내부에 우물마루를 놓았다. 태을암에서 마애삼존불까지 30미터의 돌계단이 삼존불을 찾는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더해준다.  2004년 8월30일 국보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림성만 님의 <태안 마애삼존불연구>를 크게 참고하였다. 내 글은 앞으로 계속 보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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