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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7) 상열지사

상열지사                                                                                              (27회분)

 

  “큰일이네그려.”

  잡초로 어근버근했던 분위기를 버갯속 영감이 바꾸었다.

  “예?”

  “할망구들 말이여. 날 덜덜 볶어.”

  “할망구가예?”

  “경로당 할망구들 말이여.”

  “..........”

  “노래를 불러... 또 놀러가자구...”

  “난 무신 말씀이라꼬예.”

  “어이구, 이래저래 가매이 있을 틈이 없네.”

  “울매 좋십니꺼. 뭐라꼬 보채 살 때가 좋을 때지예.”

  “이 할망구들... 원체 놀기 좋아허니께... 젊은 것들은 다 팽개치구 휴가다 뭐다 가는디 우린 뭐냐는 거여. 어이구.”

  “맞십니더. 내라도 가만 안 있지예.”

  “그려, 내가 졌다니께. 신진도(新津島)라도 갔다와야 할까벼. 멀리야 갈 수 있남.”

  “회장, 벌로 하는 깁니꺼.”

  “허, 경로 회장 말이여. 아무래두 내놔야것서.”

  “참, 작년에 고생했다 아입니꺼.”

  “그런디 헐 사람이 없어.”

  “아이구, 시키모 다 합니더.”

  “시키머 다 한다구?”

  “그럼예. 확 던져버리시이소.”

  “단짐에 던져버리라구? 맞어.”

  “지 없으머 안되는 줄 아는 사람, 많거든예.”

  “그려, 맞는 말이여.”

  “감투가 다 뭔지...”

  “바둥바둥 이길라는 사람보머 딱혀. 나이 값 할라머... 어이구, 내 평생 그리 살았슈. 편혀.”

  “............”

  나는 말없이 영감을 쳐다보았다.

  “허긴, 살아서 장(長) 한번 못하먼 죽어서 송장밖에 더 혀.” 

  “............”

  “그려, 다들 한번 씩 혀봐야혀.”

  영감은 어금니를 누르며 사퇴 의지를 다시 가다듬었다.

 

  지난봄에 경로당 노인들은 제주도를 다녀왔다. 칠팔십 대의 노인들에게 이박 삼일의 일정은 무리였다. 당시 버갯속 영감은 여행사에서 준 일정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일정표 여백은 영감이 깨알같이 연필로 쓴 메모가 가득 메웠다.

  그 때의 후유증으로 영감이 여러 날 고생했다.

  “출발헐 때 약을 먹었는디... 몰미약을 잘못 알구서 감기약을 먹었덩기여...

그도 빈속에 말이여. 쬐금 가다, 어이구, 창사가 땡기기 시작허는디... 머리털 나구 처음이여. 나, 된통 혼났다니께. 내치 밥도 못먹구... 밥이 뭐여, 기냥 죽다온기여...”

  정신을 수습한 영감은 제주도 이야기가 길었다.

  “이젠, 틀렸씨유. 더 못혀. 어이구.”

  영감은 다짐을 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음 총회에서 회장 자리를 넘겨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오늘도 영감은 새삼 제주도의 악몽을 되새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를 악문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회장 자리를 넘겨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몇 사람이나 됩니꺼?”

  “할망구가 스물이 넘구, 남자는 깨장 일곱이여.”

  안흥(安興) 앞바다 신진도(新津島)는 한 시간 남짓 거리로 가까웠다. 하루거리 일정이라도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이끌고 갔다 오려면 힘이 부칠게 분명했다.

  “여꾸리 찌르는디 워쩔거여. 내라두 총대매야지... 어이구. 마즈막이여.”

  영감은 슬쩍 입술을 쓰다듬었다. 제주도 후유증으로 입술이 터졌기에 무의식중에 손이 갔다.

  눈치 없는 동네 할머니들이 끝내 바람이 났다. 마음 여린 회장을 또 충동질을 한 게 분명했다. 지난 번 경로잔치 때 보니 할머니들이 한방 가득 모를 부었다. 게다가 자리를 차고앉아있는 기초 면적이 벌써 달랐다.

  영감들은 어두침침한 찜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서너 사람은 방 한 귀퉁이에 돌아앉아 소리 없이 고스톱에 매달렸다. 자근자근 할머니들이 찧는 입방아를 영감 몇 사람이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할망구들 등쌀을 못이기는 척 따라가는 리더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재간 없심더. 바람 넣는 김에 확 넣어삐리시이소.”

  “어이구, 할망구들... 나가머 가만있기나 허남?”

  “하모예, 뒤비쪼을라카모 뭐하로 갑니꺼. 노는 기 남는 긴데예.”

  “말 말유. 진죙일 먹구 마시구... 나가머 난 죽어. 죽는다니께.”

  “좋것십니더. 꽃밭에서 죽응께네예.”

  “꽃밭이라구? 허허. 어이구.”

  “뻐드렁 니든 사랑니든... 뭐라꼬 해싸도 할망구 치마폭에 있을 때가 그래도예.”

  “뭐라구?”

  “가자카모 가고...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이말 입니더예.”

  내가 또박또박 말하자 영감은 알아들었다.

  “허허, 그건 그려...”

  영감은 얼른 동의는 했으나 걱정이 앞서는지 말에 힘이 없었다.


  “어이쿠. 나, 읍내 약 타러 가야하는디...”

  버갯속 영감은 단호한 몸짓으로 벌떡 일어났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서둘렀다. 한 시간 간격으로 오는 마을버스가 조금 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걸 나는 얼결에 보았다.

  영감의 행선지는 길 쪽이 아니었다. 고라니 감자 밭두렁 넘듯 생강 밭 몇 이랑을 건너 뛰어 반대편 소나무 숲으로 다가갔다.

  아랫도리를 더듬는가 하더니 부동자세로 섰다. 본론에 들어가자 영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이 들어온 바다는 잔잔했다. 때 이른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버갯속 영감 머리 위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날았다. 팔봉산 능선을 따라 내려온 산비탈에는 송전선이 줄지어 늘어졌다. 영감의 뒷모습은 한가로웠다.

  오늘 영감이 말하는 약은 허리 통증 소염제이거나 전립선 약이었다. 읍내나들이를 했던 날은 버스를 세워달라고 해서 우리 집 뒤에서 내렸다. 약방을 다녀오는 날이면 약 봉지를 호주머니에서 반쯤 비죽이 꺼내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영감의 소피는 길었다. 별로 털 것도 없는 오줌 방울을 오늘은 유난히 오래 털었다. 예비동작과 마무리 절차에 훨씬 더 시간이 걸렸다.

  영감은 바지 앞을 주섬주섬 손질을 하며 밭두렁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가뿐하게 허리춤을 두어 번 추스렸다. 더없이 시원했다. 영감은 나에게 다가와서 별일이 없었다는 듯이 슬그머니 다시 주저앉았다. 읍내 갈 일이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이구, 귀먹어 지럴, 어깨 아퍼 지럴, 허리 아퍼 지럴, 오줌 나오데 지럴... 이자, 소화까정 안되네... 허, 이러다 가는 기여. 뭐, 별수 있깐.”

  영감은 갑자기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영감의 손이 당신의 타령에 맞추어 귀부터 어깨, 허리 순서로 내려와 오줌 나오는데 까지 이르렀다. 타령의 운율에 따라 영감의 손이 지나는 데를 보고 있노라니 쓴웃음이 났다. 어쩌면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탈속한 도인 같았다.

  “행교 가머 말이여, 구십 노인이 둘 있는디, 어이구, 우리보다 더 단단혀...”

  영감이 중얼거렸다.

  “오줌이 안 나온다 했더니 툭 잘라서 구워 먹자구 허대. 그러무 영감탱이가 그렇게 골을 채워. 허허...”

  “기계가 늙어머 죽는 거 하나 밖에 없슈. 어이구.”

  숙제를 빼먹은 개구쟁이들이 선생님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엉뚱한 변명을 주워대는 것 같았다. 하기야 읍내 갈 일일랑 내일하면 그만이었다.


  “근디, 부부관곈 괜찮남?”

  “예?”

  무심코 신세타령을 듣고 있던 나는 영감이 던진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버갯속 영감 얼굴에 박혔다.

  “내우(내외)간 말이여.”

  “예?”

  “허허, 이 사람. 요거 말이여...”

  영감은 검지와 중지 사이를 비집으며 엄지손가락을 끼웠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요기 뭔데예?”

  영감처럼 나도 손가락을 끼우며 물었다.

  “허허. 이 사람 보게나. 요것도 몰러? 몰러? 상열지사(相悅之事).”

  영감이 손가락 두 개를 나란히 겹쳐 내 코앞에다 바짝 갖다 댔다. 그 바람에 나는 고개를 뒤로 두 번이나 연달아 젖혔다.

  “............”

  “그래두 요게 십년 전까진 됐는디...”

  “.............”

  “허, 인제 영 틀렸슈.”

  영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몇 달 전에 ‘에이, 에이’하며 호두까기 인형을 밀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모 인자 생각도 안남니꺼?”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영감 귀에다 대고 물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다. 누가 들었을까봐 움칠했다. 그러나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허, 요거 봐. 생각이 안 난다먼 말이 되남.”

  영감은 또박또박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생각 나모 하이소.”

  “요게 원, 서야 말이지. 서도 금시 죽어.”

  영감은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 중앙을 두 번 쳤다. 나는 말없이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도 안나오구. 폐품 다 됐슈. 허허.”

  영감은 허공을 향해 눈을 껌뻑였다. 

  “모든 기 때가 있는디... 어이구. 갔다니께.”

  영감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요새 좋은 거 있다구 허긴 허대.”

  영감이 얼굴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예.”

  “읍내 다방에 나가머, 늙은이들두 앉어서 허는 소리가 맨 그 소리여.”

  “요새 세상에 아직 청춘이지예.”

  “근디... 고게 효과가 있긴 있남? 들어선 모르겄데...”

  영감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영감의 실눈이 반짝거렸다.

  “있다카데예.”

  영감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지가 한번 구해볼까예.”

  엉겁결에 내가 말했다.

  “어이구,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들을 아남?”

  영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꼬... 말이 난 짐에예.”

  “허허.”

  영감은 어도를 가로지르는 간사지를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불어오는 마파람에 드넓은 뜰은 초록 물결이 이리저리 요동을 치며 일렁거렸다.

  “난 먹지말라데. 심장 나쁜 사람은...”

  영감은 씁쓰레한 표정에 목소리마저 기어들었다.

  “.............”

  “그런디 말이여. 우린 각 방 쓴지 오래여. 버 사오년이 넘었슈.”

  “그러키나예. 아이고.”

  “우리 할망구는 건너 방, 난 안 방에서 잔다니께.”

  “아직 창창한데예.”

  “뭐라구? 내 글력(근력)이 좋다구? 허허.”

  영감은 은근 슬쩍 허리끈을 치올리며 웃었다.

  “그저께가 칠석이였지예?”

  “허허.”

  “다리 한번 걸쳐 보셨십니꺼?”

  “어이구. 고 게 말로만 되는 거이 아녀.”

  영감은 내 허벅지를 툭 치며 말했다.

  “죽었다 사는 기 그깅께네예. 제대로 해보시이소.”

  나는 양쪽 주먹을 내밀어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누가 몰러? 어이구, 이 사람.”

  “만사는 만나야 되는 거 아입니꺼.”

  “사탱이마 부딪친다구 되남? 이거 무신 말을 못하겄네.”

  영감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영감의 배터리는 소진되지 않았다. 코드만 꽂아주면 언제든지 충전이 가능한 희망의 공간이 버갯속 영감에게 오롯이 남아있었다. 오늘 스스럼없는 대화는 버갯속 영감의 완승이었다.


   “약쑥 말이여. 인제 장마도 갔응께, 시간 내 봄세잉.”

   오늘도 영감은 약쑥의 약속을 약속이나 한 듯이 꺼냈다. 언제부터인가 영감의 입에서 약쑥 이야기가 나오면 헤어질 때라는 신호였다.

  “아이고, 되는대로 하입시더.”

  “추석 전에만 하머 되는디... 풀 벨 때 마구 베버리머 안되거덩.”

  영감이 말하는 어감으로 보아 약쑥의 약속이 막바지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매 전에 말이여. 대사집에 갔다 오다 한번 들렸슈. 온전은 하더구마.”

  버갯속 영감은 우리가 벨 약쑥이 탈이 없다는 말도 곁들였다.

  “한띠 가자니께. 워쩌다 보머 가버리구 없구. 영 안 맞어. 어이구, 그나저나 오늘도 또 약 못 타누머.”



                                                                                                                        계속해서 연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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